해외파에 밀려 … 토종 뮤지컬 설자리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5면

"창작 뮤지컬요? 누가 돈 좀 많이 벌어서 쏟아붓지 않는 한 어려울 겁니다. 투자자가 붙길 하나, 관객이 봐주길 하나…. 당연히 해외 뮤지컬로 눈을 돌릴 수밖에요."

뮤지컬 제작사 대표인 A씨. 새로 구상한 작품을 투자자에게 설명하러 갈 때마다 오히려 해외 뮤지컬 제작을 제안받곤 한다. A씨는 일단 흥행이 보장되는 해외 뮤지컬을 제작한 뒤 거기서 번 돈으로 창작 뮤지컬을 해보겠다는 쪽으로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국내 창작 뮤지컬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지난 2~3년새 해외 유수 뮤지컬이 국내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힘과 기술력에 밀린 '토종'뮤지컬은 씨가 마르고 있는 것이다. 뮤지컬 관계자들은 "심각한 상황"이라고 입을 모으면서도 정작 너도나도 해외 뮤지컬로 눈을 돌리고 있다.

◆들어올 건 다 들어왔다='캐츠''시카고''싱잉 인 더 레인''토요일 밤의 열기''넌센스 잼보리''그리스'…. 올 상반기에 소개된 외국산 뮤지컬이다. 하반기에도'풀몬티''왕과 나' '맘마미아'가 공연 날짜만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도 화려했다. '오페라의 유령''레미제라블' 등 대형 해외 뮤지컬이 관객을 찾았다. 직수입이든 라이선스 방식이든, 과히 세계 4대 뮤지컬 중 '미스 사이공'만 들어오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해외 뮤지컬의 총공습은 지난 몇년새 이뤄졌다. 7개월간 장기 공연으로 대박을 터뜨린 '오페라의 유령'을 기점으로 영화 등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몰렸던 돈이 '마지막 투자처'로 꼽히는 뮤지컬로 노선을 선회했다.

이후 '그리스'(6억원), '싱잉 인 더 레인'(12억원) 등 대부분의 해외 뮤지컬에는 창투사의 대형 자금이 유입되고 있다. 오디뮤지컬컴퍼니 신춘수 대표는 "창작물인 경우 투자자를 만날 기회조차 없는 반면, 해외 유명 뮤지컬은 먼저 제안이 들어올 정도로 적극적"이라고 말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올해 선보이는 순수 창작 뮤지컬은 '탭뮤지컬 마네킹''페퍼민트' 정도다. 수십편의 해외 뮤지컬에 비하면 초라한 모습이다.

이렇듯 고전하는 이유는 대부분 돈 때문이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선 오랜 기간 준비가 필요한데 국내에서 꿈도 못꾸는 형편이다. 외국에서는 뮤지컬 하나 만드는 데 3년 이상을 투자한다.

반면 국내에선 몇개월 새에 작품 하나를 뚝딱 만들어 올린다. 작곡과 안무, 배우의 연습이 동시 진행형이다. 외국 시스템대로 차근차근 준비하면 좋겠지만 그럴 경우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지불해야 할 경비가 엄청나게 불어나기 때문에 엄두를 못내는 것이다.

극작.연출.작곡을 전문으로 하는 인력도 턱없이 모자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내 창작물은 점점 더 관객의 외면을 받는 처지가 됐다.

◆위기는 또다른 기회다=지난 10여년간 국내 창작 뮤지컬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스타가 될거야''더 플레이''사랑은 비를 타고''락햄릿''난타' 등은 팬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았거나, 비록 흥행은 못했지만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서울뮤지컬컴퍼니 김용현 대표는 "치밀한 플롯과 화려한 세트, 수백억원의 제작비 등으로 중무장한 외국산 뮤지컬과는 처음부터 싸움 상대가 될 수 없다"며 "우리 정서에 맞는 작품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살롱 뮤지컬'의 부활을 강조했다. 소극장용 뮤지컬을 선보인 뒤 관객 반응에 따라 이를 보완.발전시켜 나가는 방식인데, '사랑은 비를 타고''더 플레이'는 이 방식의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일부에선 "한국 영화가 경쟁력이 생기면서 외국 영화보다 점유율을 높여갔듯, 괜찮은 작품 몇개만 나와주면 전세는 역전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시각도 있다. 문제는 해외 뮤지컬의 공습 속에서 어느 누가 총대를 메고 창작 뮤지컬에 불을 지피느냐는 것이다.

박지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