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투명한 유통 고민할 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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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호 29면

“문화계 곳곳에 손길을 뻗친 최순실도 관심을 안 가진 분야가 어딘줄 알아? 출판이야. 돈이 안 된다는 걸 안 거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시끄럽던 지난 연말, 한 출판계 인사가 자조적으로 내뱉은 농담이다. 한국 출판계가 ‘빅뱅 이래 최대 불황’을 겪고 있다는 건 입만 아픈 이야기. 새해엔 조금 희망이 보이려나 했는데, 연초부터 어마어마한 악재가 터졌다. 북센과 함께 국내 양대 서적 도매상이던 송인서적(이하 송인)이 3일 어음을 막지 못해 최종 부도를 선언했다는 소식이다.


송인은 교보문고·예스24·알라딘 등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대형 서점 일부를 제외하고 흔히 말하는 동네 책방, 중소형 서점에 책을 공급해 온 유통사다. 2000여 개 출판사가 송인과 거래를 하고 있고, 송인이 이 출판사들에 발행한 어음이 현재 100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부도로 인해 피해는 송인이 발행한 어음을 받은 출판사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요 며칠 SNS는 몇 천만원에서 많게는 몇 억원까지 피해 본 출판사 대표들의 한숨과 탄식으로 가득하다.


이 와중에 출판인들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냉소적인 반응이다. 송인 부도 관련 뉴스의 댓글에는 “책값 할인을 제한한 도서정가제 때문에 이런 사태가 왔다” “책값을 올리려는 출판사들의 욕심이 빚어낸 결과” 등 이번 사태의 원인을 ‘도서정가제’ 탓으로 돌리는 의견이 많다. 2014년 말 시행된 개정 도서정가제는 무분별한 할인경쟁을 막기 위해 신·구간을 막론하고 책 할인폭을 최대 15%로 제한하는 제도다.


빠듯한 살림에 책 한 권 사기도 부담스럽고, 거기에 현 정부 아래 시행된 모든 제도를 비딱하게 보게 되는 상황은 이해한다. 하지만 송인의 부도를 도서정가제와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아무래도 억지다. 한 출판계 관계자는 “송인의 경영이 악화된 근본적 이유는 온라인 서점들의 과도한 할인으로 송인의 거래처인 동네 서점들이 급속도로 줄어들게 된 것”이라며 “도서정가제를 ‘너무 늦게’ 한 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일 수 있다”고 했다.


직·간접적 원인이 있겠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안다. 출판계가 계속해서 어려워지는 이유는 결국 책을 읽지 않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2015년 2인 이상 가구의 월평균 서적구입비가 1만6623원으로 저렴한 책 한 권 살 정도고, 독서 시간은 평일 기준 하루 평균 6분밖에 안 된다. 2016년은 더 나빠졌을 가능성이 크다. 인구가 줄고 스마트폰 등 책을 대체할 미디어가 나날이 늘어가는 시대의 변화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조용히 앉아 책을 펼치기에 한국인의 삶이 너무 고되다는 게 문제다. 책은 두뇌를 사용해야 하는 적극적 오락인데, 먹고사는 일 말고는 생각할 여유가 없다. 세월호·메르스·대통령 탄핵 등 신경을 고스란히 빼앗아간 사건이 줄을 이었던 요 몇 년은 더욱 그랬다.


4일 한국출판인회의가 주축이 돼 채권단을 구성하고 정부 역시 자금 유동성이 떨어진 출판사들에 낮은 이자로 융자를 해 주는 방안 등 대책을 고민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꾸준히 가치 있는 책을 펴내며 출판계 토양을 풍성하게 다져 왔던 작은 출판사들이 이번 위기를 무사히 넘기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어음이라는 단어, 이번에 진짜 오랜만에 들어봤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뒤처져 있는 출판계 유통구조를 서둘러 바꿔나가야 한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현재는 도서 유통 전산화가 이뤄지지 않아, 책이 일단 도매상으로 넘어가면 어떤 서점에서 얼마나 팔렸는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며 “정부와 출판계가 함께 나서 유통 현대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책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책 읽는 분위기를 확산해나가는 일도 미룰 수 없다. 작가 은유씨가 출판계 동료들을 위로하며 4일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썼다. “소 잃어본 자가 외양간 고친다.” 이제 외양간을 고쳐야 할 때다.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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