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한 문제에 겉으로 중립자세|한국사태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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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워싱턴=한남규특파원】 미국은 한국의 정치적 대립상황에 대해 당분간은 공개적 외교활동을 하지 않을 것 으로 알려진 반면 여론은 계속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미국무성의 「필리스·오클리」 부 대변인이 15일 『이번 사태는 한국의 내정문제』 라며 『어떤 외교적 조치를 취할 것이냐는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고 말하는가 하면 「리처드·아미티지」 미 국방성 국제안보 문제 차관보는 『페르시아만 문제와 이란 길트라 스캔들 건으로 솔직히 말해 바쁘다』고 말했다.
한국사태를 매일 매시간방송의 탑뉴스로, 신문의 1면 기사로 급박하게 다루는 언론과 비교할 때 미 정부자세는 매우 대조적이다.
연일 국무성 논평을 통해 한국사태에 관한 논평을 하고있지만 대외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부닥칠 때 정부는 우선 표면적으로 중립적 자세를 지키고 언론이 적극적으로 미국입장을 표현하는 워싱턴의 하모니는 어제오늘만 보는 일은 아니다.
미국이 아직까지 적극적 외교조치를 공개적으로 취하지 않는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다.
16일 국무성 브리핑에서 한 미국기자가 『한국과 필리핀은 어떻게 다르냐』 고 질문했듯이 흔히 미국언론이 서울의 상황악화와 관련해 필리핀 「전철」 을 들먹이지만 그들도 실제로는 두 나라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모두 인정한다. 「마르코스」 가 권좌에서 물러서는 과정에서 미국이 「필립·하비브」 특사를 마닐라에 보내고 군원중단 위협을 가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은 정치적·경제적 환경이 다르고, 적극 개입의 경우 폭력사태를 가열시켜 결국엔 미국 스스로의 한반도에서의 이해마저 저해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이 같은 자세를 놓고 「에드워드·메이커」 하버드大 교수는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비판을 받지 않으려고 현상유지를 원하고 있다』 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애당초부터 이 같은 좌시자세로 일관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뉴욕타임즈지가 16일 고위 소식통을 인용, 보도한데 따르면 「레이건」 대통령이 한국정국 방향에 우려를 나타내는 사신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방안, 「슐츠」 국무장관 등 고위관리가 한국의 개헌논의 중단조치를 비난하는 강경 연설을 하는 방안 등을 검토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한미안보관계의 재검토도 잠깐 얘기가 됐었으나 현명치 못한 발상이라고 즉각 판단이 내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한마디로 말해 미국정부는 이 같은 조치들을 취할 경우 뚜렷한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고 오히려 야당 및 재야를 격발, 사태가 더욱 가열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있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는 원칙론을 강조하되 실질적으로는 섣불리 말려들지 않겠다는 자세다. 이미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 길트라 사건으로 심각한 대내외적인 이미지 손상을 입고 임기 말의 곤경을 겪고있는 터다. 타국의 「내정」 에 섣불리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는 심리적 배경이기도하다.
뉴욕타임즈 지는 「제임즈·릴리」 주한 미대사가 한국의 개헌논의 중단 내용의 4·13조치를 하루 전 통보 받았는데도 미정부는 이에 대해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었다고 공개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정부가 움직임을 전혀 동결한 것은 아닌 듯하다. 「오클리」 부대변인은 16일 『우리는 한국정부와 광범위한 대화를 지속하고 있다』 고 밝혔다. 다시 말해 공개적으론 한미간에 오가는 대화 내용을 밝힐 수 없지만 「조용한 외교」는 계속하고있다는 얘기다.
이미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가 거의 1주일간 계속되고 있고 16일에는 다시 「솔라즈」 의원 (민주) 의 한국관계 결의안이 의회에 제출됨으로써 일단은 행정부가 외교자세 전환이 필요하다고 할 경우에 전제되어야 할 「기초작업」 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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