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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렁한 연말 공연장, 김영란법만 탓할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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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창주 공연기획사 빈체로 대표

이창주
공연기획사 빈체로 대표

얼마 전 한국공연예술경영인협회 총회 및 송년회가 열렸다. 30여 년 전 출발해 현재 80여 개 회원사 200여 명 회원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협의하는 국내 유일의 공연기획자 전문 모임이다.

기업 지원 끊기고 초대도 못해
공연시장 취약성 그대로 노출
돈 내고 보는 문화 장려하고
기업도 조건 없는 후원해 주길

이날 많은 회원사 및 회원들이 참석했지만, 올해는 어느 해보다 표정이 어두웠다. 2014년 세월호 사건, 지난해 메르스 사태로 공연업계가 어렵긴 했지만, 올해처럼 힘든 한 해는 일찍이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설마 했지만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이 이렇게까지 한국 공연시장, 특히 클래식 시장에 큰 타격을 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을 못했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공연에 대한 기업의 후원이 줄었다는 것이다. 9월 법 시행 이전 구두로 계약했던 후원금을 3분의 1로 줄여버린 기업도 있다. 공공성을 지닌 은행 같은 곳에서는 아예 협찬을 끊었다. 초대권 사용에 많은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기업은 협찬 비용의 통상 30~40%를 티켓으로 환산해 제공받는다. 티켓은 고객 관리에 쓴다. 그런데 고객 중 많은 인사가 김영란법 대상자이기 때문에 초대권을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초대권이 금품으로 규정돼 5만원 이상의 티켓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예전처럼 후원할 명분이 줄어들었다.

해외 연주자나 오케스트라 같은 연주 단체의 내한공연은 2000석 이상의 티켓을 매진시켜도 제작비를 맞출 수 없다. 개런티가 높고, 관객층은 한정적이어서 1회 또는 2회밖에 공연할 수 없으니 공연 한 회당 제작 단가를 낮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업의 후원이 있어야 청중이 사는 티켓 가격도 적정선을 유지할 수 있다. 김영란법 이후 기업 후원의 감소는 이런 기존의 시스템을 위협하고 있다.

한국 연주자들의 공연이라고 사정이 나은 것은 아니다. 물론 국내 공연단체들의 공연은 해외 단체만큼 제작비가 크지는 않다. 하지만 청중이 자신의 돈으로 티켓을 사는 경우가 드물다. 공연을 여는 연주자나 공연 단체들은 아는 사람들을 초대해 객석을 채우고 연주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초대도 불가능해졌다. 초청 인사들 역시 김영란법 대상자가 많기 때문이다. 이 결과로 공연장은 텅 비고, 연주자들은 의욕을 잃어 가고 있다.

김영란법은 한국 공연시장의 한국적 특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후원금을 티켓으로 돌려받는 문화, 연주자들이 지인을 초청해 공연을 여는 세태 등이다.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은 이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선 협찬의 인식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기업이 공연에 많은 돈을 후원하고도 프로그램북 말미에 ‘후원했다’는 식의 한 줄만 추가되는 경우가 많다. 후원금을 티켓으로 바꾸는 비율은 10%를 넘지 않는 게 보통이다. 티켓이 더 필요하면 직접 구매한다. 한국의 일부 후원 기업이 후원금 100%를 티켓으로 요구하기도 하는 상황과 대비된다. 소비자, 혹은 청중의 인식도 다르다. 일본의 청중은 단 한 줄의 후원 알림에도 기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

당장 일본처럼 되기는 힘들 것이다. 경제는 어렵고, 허리띠를 졸라맨 기업은 후원의 대가가 뚜렷하게 보이기를 원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의 급격한 인식 변화만 요구하는 것은 공허하게 들린다. 국내 연주자 공연에 티켓을 구매해 관람해야 한다는 것도 방향은 올바른 대안이지만 당장 바뀌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러니 좀 더 현실적인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기업의 공연 후원에 대한 세제 혜택을 늘려주는 방법, 공연 초대권과 관련해서는 김영란법에서 예외를 두는 방법 등이 당장 검토해볼 만한 대안이다.

예술공연은 다른 대중공연이나 뮤지컬공연같이 잘하면 소위 대박을 내는 구조가 아니기에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 미래에 국가의 정신적 가치를 높일 수 있기 때문에 많은 투자와 활성화될 여건을 나라에서 마련해 줘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예술공연이 얼마나 힘든 여건인지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최근 상황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세계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베를린 필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며 정부에 지원 요청을 해 놓은 상태고 현재 심각하게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혜택을 주지는 못할망정 우리는 김영란법으로 예술공연업계를 압박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할 따름이다.

만일 관객층이 훨씬 두터워지고 기업의 후원 시스템이 보다 정상적으로 바뀐다면 김영란법이나 시국 불안 같은 요소에 공연 시장도 덜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태계가 완성될 때까지는 제도적 도움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엘시스테마’도 오랜 시간이 걸린 국가 사업이었다. 많은 청소년이 마약에서 벗어나고 음악에서 희망을 찾았다. 예술 지원의 성과는 단기간에 나타나지 않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김영란법이 공연 시장을 더 망가뜨리기 전에 보완책과 장기적인 대책이 빨리 나와주길 바란다.

이창주 공연기획사 빈체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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