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계란 대란 부른 AI 사태, 정부가 안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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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조류인플루엔자(AI)가 재앙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달 16일 전남 해남 농가에서 최초 의심신고가 접수된 이후 한 달여 만인 지난 19일 자정까지 살처분된 가금류가 2000만 마리를 넘어섰다. 2014~2015년 고병원성 H5N8형 발생으로 669일간 1937만 마리를 살처분한 기록을 넘어 역대 최단·최악의 AI 피해를 낳고 있다.

살처분 2000만 마리 넘어 역대 최대
정부, 국정 공백 속 초동 대응 실패해
총리가 직접 챙기며 범정부 대응해야

번식용인 산란종계는 전체 사육 대비 38.6%가 살처분돼 자칫 양계산업의 기반이 무너질 위기다. 알 낳는 산란계는 17.8%가 살처분돼 시중에 달걀값 폭등과 공급 부족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사상 처음 항공편을 통한 생달걀 수입까지 추진 중이다. AI로 인한 농가 보상금과 생계소득 안정 등에 드는 국가 예산도 2014~2015년보다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당시에는 살처분 보상금 1392억원을 포함해 모두 2381억원이 들어갔다.

문제는 앞으로 AI 피해가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현재 소독·살처분 등 차단 방역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데다 AI를 보유한 야생 철새가 한반도로 계속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AI 바이러스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더 기승을 부린다. 이제 바이러스의 위력이 잦아들 내년 봄까지 사태가 장기화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각오해야 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정부가 보이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AI 발생 초기에 정부 부처의 늑장 대응과 허술한 방역 대책으로 피해를 키웠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AI 대책을 다루는 범정부 차원의 관계장관회의가 지난 12일에야 처음 열렸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농가 최초 신고 이후 26일 만이며 야생 조류 확진 판정이 난 지 한 달 만이다. 위기경보는 AI가 사실상 전 지역으로 확산한 다음인 16일에야 최고 단계인 ‘심각’으로 격상됐다. 올겨울 AI 확인 2시간 만에 아베 신조 총리가 직접 방역을 챙기면서 위기경보를 즉시 최고 단계로 격상한 일본 사례를 굳이 들 필요도 없다. 2014년 1월 전북 고창에서 첫 AI 의심신고가 접수된 지 이틀 만에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 주재로 8개 부처가 긴급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범정부 차원의 대책을 마련했던 것과도 대비된다.

최순실 사태를 틈타 공직사회가 일손을 놓는 바람에 방역 컨트롤타워가 실종돼 ‘초기 골든타임’을 놓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똑같은 AI 바이러스를 지닌 철새들이 중국~한국~일본을 오간다. 그럼에도 한국과 일본의 살처분 가금류 비율이 2000만 대 100만 마리라니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황 총리가 AI 사태를 직접 챙기고, 주무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에도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겨울철마다 AI 재앙이 반복되는 만큼 정부는 양계산업을 비롯한 한국 축산업의 미래 전략을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필요하면 가금류 사육농가가 AI가 창궐하는 겨울철에 사육을 중단하는 대신 농가에 보상금을 지원하는 ‘휴업보상제’ 도입도 적극 검토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