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는 에세이 |쫓겨난 두 성자 황승보(경북문경군 호계면 막곡2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국민학교 뒤 조그마한 감자밭의 잡초를 뽑고 집으로 돌아오던 저녁 어스름. 5백년이상 묵었다는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는 고개마루에서 한 중년의 털보사내가 무슨 물건들을 잔뜩 늘어놓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이따금 우리 마을에 나타나곤 했던 엿장수였는데, 재미있는 것은 리어카 대신 경운기를 끌고 다닌다는 사실.
이날도 마을에서 이것저것 수집한 고물을 경운기 속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는 중이었다. 몇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는지라 털보사내는 나에게 아는체를 하였고, 나도 지친 다리를 쉴겸해서 잠시 경운기 옆에 앉아 담배 한 대를 그에게 권하였다.
농사를 짓고 있으면서도 틈틈이 책을 읽는 것을 낙으로 삼아왔던 까닭에 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경운기 구석에 팽개쳐져 있는 한 권의 책위에 머무르게 되었다. 사내의 허락도 받지 않고 얼른 집어든 그 책의 제목은 『인간예수와 불타』.
기독교와 불교의 창시자들 생애를 비교 분석한 책일터인데 어느 어리석은(?)산골 생원에게서 버림 받았을까. 책표지까지 뜯겨져 있었지만 속 페이지들에는 이따금 붉은 밑줄이 그어져 있는 것을 보면 이 책의 주인역시 성군의 고향을 따라 상상의 짐을 꾸렸을 법한데 어떤 이유로 예수와 불타는 그의 집에서 추방당했을까.
하여튼 가까운 책 병원은 우리집 밖에 없고 의사또한 나말고 또 있겠는가 하여 음료수 빈변 다섯개를 주고 부랴부랴 그 책을 샀다.
결국 곧 휴지처럼 한 장씩 뜯겨질 운명에 처했던 그 책은 그날 저녁부터 새 주인의 서가에 꽂히게 됐다.
그날밤 나는 표지도 하나달아 줄겸 오랜만에 먹을 갈았다. 내 누추한 집이 두 성자의 마지막 신전이 되기를 바라면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