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개월 젖먹이의 소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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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호 30면

이제 11개월을 막 넘긴 젖먹이 아기가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엄마의 젖을 떼는 연습이 시작되었지만 이유식에 큰 덩어리가 있으면 안 되는 한 돌도 안 된 여아다. 보행기를 밀며 발걸음을 옮길 정도로 직립원인이 되기에 한 참 먼 아기가 겨울밤 추위 속에 촛불시위에 간 것이다. 필자의 외손녀인 아기는 부모의 품에 안겨서 갔을 것이고 자유발언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체가 경악스런 국정의 사유화, 저질 패거리들의 국정 농단, 권력자들의 거짓말 릴레이에 대한 탄식과 분노의 절실한 비언어 소통이다.


유모차에 아기를 누이고, 자녀의 손을 잡거나 목말을 태운 가족, 이심전심의 친지와 동료들. 나이, 직업, 계층, 지역에 관계없이 자발적으로 비행기와 버스를 타고 방방곡곡에서 촛불을 든 것은 이전의 시위와 너무나 달랐다. 갑으로부터 지시 일변도인 상의하달이 아닌 하의상달의 소통이었다. 민초들은 더 이상 소시민이 아닌 것이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 / 한 번 정정당당하게 /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 /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 그리고 조금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이것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거대한 모순 덩어리인 고궁의 음탕대신 우리는 왜 조그만 한 것에만 번뇌하고 항의하는 옹졸한 소시민인가에 대한 시인의 아픔은 2016년 촛불집회로 안녕을 고해도 된다. 살아가는 것을 닮은 일상적인 참여는 소시민이 주는 자괴감으로부터 해방을 선언케 한다. 1차 5만, 3차 100만, 5차 190만, 6차 232만. 부패하고 불의한 권력을 태우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촛불의 행렬. 겨울 추위와 피로감으로 6차 집회에는 참여인원이 감소할 것으로 예측했지만 역대 최고로 증가했다. 책임을 전가하고 아무런 대책도 없는 세 차례 담화는 연민마저 희석하고 대신 청와대를 향한 분노는 높아져 하늘에 닿게 했다. 법원이 허용하는 시위 허용거리도 800m에서 100m로 좁혀졌고, 단죄를 기다리는 인내의 거리도 짧아졌다.


대통령은 기괴한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외국 언론의 조롱거리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촛불시위는 갈수록 잃어버린 민주주의의 부활 사례로 칭송받고 있다. 수천 명만 모여도 공격, 폭력, 방화, 파괴, 약탈, 총기사용이 빈번한 외국의 사례와 대조되고 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건 건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보다 어렵다”던 1951년 영국 더 타임즈의 사설도 부끄러워 할 것이다.


권력자의 오만한 불통, 사익에 혈안이 된 영혼 없는 엘리트가 사회적 소통을 독점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나라의 공적 사안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이 활발하게 개진되는 시민소통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광화문 광장에서 한 점 쓰레기마저 남기지 않으려는 절제와 가족과 함께 자신들의 나라가 가야할 길을 단호하게 밝히는 소통의 극대화를 보여준 촛불 정신이 꺼져서는 안된다. 그래야 젖먹이 아기도 대한민국도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것이다. 행동하는 소통은 더 이상 변방이 아니고 세상의 중심이다.


김정기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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