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낙중 <서울 구로구 ?산3동·학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그날은 몹시 추웠다. 전철의 문이 열리자 갑자기 더운 열기와 함께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나는 내가 느꼈던 추위만큼 강렬한 속도로 객차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상하게도 이 날은 객차에 승객이 거의 없었다. 그 덕분에 나는 비교적 넓은 공간을 차지한채 좌석에 앉았다.
지하철의 항상 같은 속도는 얼마나 식상감을 안겨주는지. 곧 몸이 더워진데다가 예의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고개를 젖히는 순간 내 머리위의 짐칸에 한 권의 책이 얹혀져 있음을 발견한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때였다. 『문학사회학의 방법』.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이었는지라 그 책의 주인이 누구일까 궁금했다. 그러나 내자리 주위에는 아무도 그 책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었다.
가뜩이나 텅텅 빈 자리였기에 그 책은 이미 주인을 잃은 책임이 분명했다. 역이 바뀔 때마다 그 책은 여전히 얌전한 태도로 그 자리에 얹혀있을 뿐이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책은 나의 소유욕에 불을 댕겼다.
소유욕은 곧 죄책감을 억누르며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나는 결심 (?)을 하고 말았다.
하차할 역이 다가오기 바로 직전 내 손아귀에 들려 있는 그 책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문이 열리고 나는 자연스럽게 한쪽 발을 밖으로 내밀었다. 그때 나는 실수로 앞서 내리던 한 30대 초반 여성의 어깨에 가볍게 부딪치고 말았다.
『학생! 고마와요. 잊고 갈뻔 했는데 이렇게 챙겨주다니.』
책을 건네준 뒤 나는 역 구내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수치심과 모멸감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기억해냈다. 그녀가 책을 받으며 보낸 미소를.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예요』라고 말하는 듯한 그 정상 참작의 미소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