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남은 몇가지 의문|「범양사건」 발표를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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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 부실기업주의 자살로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한 이른바 범양사건은 이제 그것이 한 부실기업과 그 경영주들의 비리와 탈법, 배신의 드라머가 아니라 우리의 시대, 고도성장으로 불러지는 경제개발사의 한 전형적인 단면으로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거기에는 한건주의와 실속주의에 급급하는 관료주의와 관치금융, 정책의 시행착오와 무책임이 있었고 정책과 행정의 온갖 지원과 혜택을 오로지 개인적 성취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천민자본주의적 기업풍토, 전근대적 기업가 정신이 드러났으며, 이 양자간의 결합과정을 매개하는 금융과 제도, 법령과 행정등 모든 사회적·제도적 견제장치나 감독기능이 얼마나 무력하고 보잘것 없는 것인지도 백일하에 드러났다.
부실기업가들은 정책의 특혜와 지원, 사회적 희생과 국민적 부담을 거대한 기업부실로 보답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그 부실을 핑계삼아 불법과 비리, 부도덕을 자행함으로써 부실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 사건의 당사자들이 저지른 부정과 불법의 규모가 실제로 어떤 의미의 액수인지 전혀 실감나지 않는다. 다만 이 사상최대의 외화도피와 탈세, 횡령과 유용, 변태지출과 재산은닉 사건은 우리에게 몇가지 분명한 의문을 남긴다.
그 첫째는 이 거대한 불법의 연소가 어떻게해서 장기간동안 온존될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해운부실의 조짐은 이미 80년대초부터 나타났고 그동안 세차례나 부실정리 과정을 거치면서도 이같은 대형 불법이 지속될수 있었는지 우리는 이해할수 없다.
그 많은 관리관청과 감독기관, 관련은행들은 그동안 무엇을 관리하고 감독했는지 궁금하다. 부실정리라는 이름으로 온갖 특혜와 지원을 베풀면서 언제나 그 명분은 기업갱생과 합리화였고 국민부담은 불가피하다고 했다.
이제 그같은 명분과 구실이 얼마나 허구와 무실에 근거한 것인지도 명백히 드러났다. 그리고 이같은 허구와 부실이 비단 범양사건에 국한되었다고 믿기도 어렵게되었다.
때문에 우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3년여에 걸친 부실기업 정리과정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것을 촉구하지 않을수 없다.
부실의 진정한 뿌리가 어디에 있었으며, 부실화의 과정은 경영의 불법과 무관했는지, 그리고 부실기업과 기업주들의 경영쇄신과 자구노력이 국민적 부담과 지원을 정당화할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철저하게 재점검해야할 것이다.
이번 사건은 아직도 그 전모가 밝혀지기에는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한 국민적 분노와 실망, 불신의 깊이를 생각할 때 사건과 관련된 모든 진실이 철저하게, 더욱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그리고 그 밝혀진 진실에 따라 엄중하고 객관적인 책임소재의 규명과 문책이 있어야 한다. 그와 함께 부실기업의 모든 현황과 정리의 실체를 밝히는 부실기업백서의 공개를 거듭 촉구하는 바다.
책임규명과 진상공개만이 부실의 재발을 방지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외환관리법을 비롯해서 이번 사건으로 허점을 드러낸 모든 제도와 법령을 정비하는 일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범양사건의 전말은 이 시대의 경제정책과 관료행정, 기업풍토와 기업가 정신, 금융의 정부지배와 무책임을 상징하는 한 전형이 되기에 족하므로 모든 당사자들의 심각한 반성의 계기가 돼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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