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란 끝없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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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8호 6 면

양손에 든 커다란 가방 두 개가 정말 무거워 보였다. 친구와 카드를 치다 죽은 형의 환영을 만날 때도, 사람구실 못하는 아들을 걱정하는 모습도 마치 실제 내 아버지를 보는 양 마음이 짠했다. 연기인생 60주년을 맞은 배우 이순재(81)가 지난달 28일 연습공개에서 보여준 ‘연기’다.


연기인생 ‘40주년’ ‘50주년’은 많이 들어 봤지만 ‘60주년’은 처음 듣는다. 걸어온 길이 곧 역사가 된 선생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희수(喜壽·77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방송과 영화는 물론 최근에도 ‘사랑별곡’ ‘법대로 합시다!’ 등 쉼없이 무대에도 서 왔기에 ‘60주년 기념 공연’이란 타이틀이 일견 새삼스럽기도 하지만, ‘세일즈맨의 죽음’(12월 13~22일 아르코예술극장)은 좀 특별한 무대가 될 것 같다.


배우 김태훈이 주축이 된 ‘이순재 연기인생 60주년 기념사업회’가 추진한 공연으로, 창작진과 출연진 모두 이순재와 끈끈한 인연을 맺어 온 후배와 제자로 구성됐다. 세종대 교수인 김태훈은 본인이 주관하는 연극 잡지 인터뷰 도중 이순재의 데뷔연도를 알게 됐다. 선생은 “소란 떨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는 몸소 기념사업회를 꾸려 추진위원장을 도맡고 출연까지 자처했다.


선생은 여전히 ‘60주년’이란 타이틀이 부담스러운 듯 의미부여를 한사코 마다했다. “감회가 새롭다”거나 “세월이 화살 같다” 류의 감상적인 발언도 삼갔다. 초지일관 그저 늘 하던 연극을 또 한 번 한다는 일상적인 태도였다. “이렇게 하려고 시작한 건 아니거든요. 내가 햇수를 안 따지는 사람이에요. 생일도 잘 모르고 지나갈 정도니 60주년이란 개념도 없었는데 주변의 권고로 진행하게 됐어요. 일이 커져서 송구스럽고 부담스럽죠. 손숙 선생을 비롯해서 이문수, 맹봉학 선생 등이 참여해 줘서 큰 힘을 받고 있어요.”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택한 이유도 단순했다. “창작극이면 좋겠지만 늙은이가 주역을 할 수 있는 작품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1978년 이 작품에 처음 선 이래, 2000년, 2012년을 거쳐 이번이 4번째 프로덕션이다. “과거엔 너무나 어려운 작품이라 이해 못 하는 부분도 많고 연기 완성도도 부족했어요. 이번엔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최선을 다해야죠.”


이번 무대가 텍스트적으로 특별한 건 2시간 40분 분량의 원작을 충실히 살린다는 점이다. 한국 공연이 매번 2시간 안팎으로 압축되던 관행을 깨는 시도로, ‘20세기 최고의 희곡’을 원본 그대로 감상할 수 있는 초유의 기회다. 박병수 연출도 “영어 원본을 배우들과 함께 분석하며 윌리 등 모든 인물들을 원전에 가깝게 복원하려 애썼다”면서 “진정한 배우중심 예술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라고 했다.


선생은 “사실 고전들이 상당히 앞서간다”면서 “그간 미처 몰라서 놓쳤던 것들을 보완해서 원작에 충실하게 표현해 보겠다”고 보탰다. “가족 관계 등 한국인의 정서와 잘 맞는 작품이지만 과거에는 공감 못 했던 부분도 있어요. 도시개발, 환경문제 등이 그땐 심각하지 않았는데 세월과 함께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됐죠. 그런 게 바로 고전 아닌가 해요.”


김태훈 교수는 이번 공연이 단순히 한 분의 삶을 기념하는 의미는 아니라고 했다. 현재 소득 하위 30% 직종이라는 한국 연극인들이 당면한 고민에 같은 고민을 거쳐 온 선생의 60주년으로 가르침을 주고 싶어서라는 것이다. 선생도 “예나 지금이나 연극은 처절한 각오를 해야 하는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요즘 문화융성이 아니라 문화 말살이 돼 버렸지만 우리 스스로 의지를 가지면 조건은 나날이 좋아질 거예요. 평생을 공부해야 하고, 하다 보면 우뚝 설 수도 있지만 그게 완성은 아니죠. 그 후에 또 다른 세계가 있으니 연기도 끝이 없고 항상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야 하는 작업이라 생각해요. 그 보람으로 하는 걸 테지.”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배우 이순재 연기인생 60주년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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