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질 모래성을 움켜잡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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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7호 29면

국정을 농단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취했던 이들의 추악한 민낯이 만천하에 까발려지고 있다. 약방의 감초처럼 그들이 믿던 종교도 한몫했다던가. 그 무작함이 어떤 막장 드마라보다 더하구나. 무당 짓거리라고 하니 진짜 무당들은 그 희떠움을 못마땅해 하고, 목사의 탈을 썼다고 하니 목사들 또한 그 가식과 위선에 분노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신의 대리인을 사칭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들은 물론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예수 시대에도 목자라면서 양의 가죽을 쓰고 늑대짓을 한 날삯꾼들은 있었다. 양들을 잘 돌보는 선한 목자가 아니라 품삯만 노리는 도둑들. 그들의 겉모습은 아령칙하여 그 정체성을 구분하기 어렵지만, 때가 차면 그 허상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시인 루미는 말했지. “그대 생각이 장미면 그대는 장미원이다. 그대 생각이 가시나무면 그대는 아궁이 속 땔감이다.” 언거번거할 것 없겠다.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둔다.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천하를 한 손아귀에 움켜쥔 양 떵떵거리던 자들이라도 결코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옛 사람 노자도 말했다지. “하늘의 그물은 성긴 듯하나 빠뜨림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失)”고.


며칠 전 일용품을 사러 자주 가는 구멍가게에 들렀다. 주인은 70세가 넘은 할머니. TV에 눈길을 던지고 있던 할머니가 내가 산 물건과 거스름돈을 건네주며 말했다. “양파도 아닌데, 까도 까도 또 나오네. 저 여자 이제 물러나야 해요.” 내가 넌지시 물었다. “왜요? 그래도 대통령인데.” “자기가 저질렀으니 대가를 치러야지요. 업보예요.” 민심이 천심이라 했던가. 평소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너름새를 가진 할머니지만, 빠뜨림이 없는 하늘그물처럼 단호하게 ‘업보’를 되뇌었다.


독실한 불교도 할머니의 일갈은 잠시 종교의 본질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모름지기 종교는 사람을 그 존재의 무거움에서 가볍게 하는 예술이 아니던가. 하지만 본래의 종지(宗旨)에서 멀어지면, 그런 종교는 인간의 삶을 더 무겁게 할 뿐. 어리석은 사람을 더 어리석음에 빠뜨리고, 고통 속에 사는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할 뿐. 그리고 그런 종교에 속한 이는 저 혼자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온 세상에 불을 지른다. 루미의 시구가 다시 가슴을 친다. “영적 각성이 이 세상을 무너뜨린다. 각성은 저 세상에 속한 것이기에 그것이 터를 잡으면 물질계는 허물어진다.” 종교를 빙자한 권력, 혹은 권력에 빌붙은 종교는 영적 각성과는 거리가 먼 물질계에 속한 것이기에 끝내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한때 떵떵거리던 권력이 지금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어릴 적 강가에 살던 나는 자주 모래성 쌓기 놀이를 했다. 그렇게 놀이를 하다 황혼이 지면 공들여 쌓은 모래성을 허물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철부지 아이들도 알건만, 끝내 허물어질 것을 움켜잡고 놓치 않으려 몸부림치는 모래성의 주인은 과연 생의 미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진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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