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나빠 일기도 안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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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스위스의 「대표적 지성」으로 일컬어지는 「막스·프리시」(76)는 금세기 최대작가 가운데 한사람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특히 87년도의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부상하고 있다. 다음 글은 스위스문화재단 「프로 헬베치아」초청으로 최근 스위스를 다녀온 안인길 교수(중앙대·독문학)가 전하는 「프러시」의 근황이다. 안 교수는 귀로에 서독에 들러 85년7월 작고한 72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하인리히·뵐」의 흔적도 더듬었다. <편집자주>
필자는 오래 전부터 저서 『막스·프리시연구』를 집필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의 스위스 방문은 절호의 기회였다. 82년에 설립된 「막스·프리시」자료실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프리시」를 직접 만나 내 집필작업을 확인·보충하고 자문까지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토마스·만」자료실과 함께 취리히 국립공과대학교에 자리잡고 있는「막스·프리시」자료실은 「프리시」재단 지원으로 유지되고 있다.
독문학군「오브슐라거」씨가 오전만 문을 열고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데 벽을 가득 메운 서가에는「프리시」의 작품들보다 그에 관한 연구서적과 번역서들이 훨씬 더 많이 눈에 띄었다. 필자의 역서들도 끼어있어 반가왔다. 자료실의 봉한 편지들에는 살아있는 제3자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있어,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열람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다.1백년 후에나 공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프리시」의 일기를 읽다가 일정항목을 확인하고 싶을 경우 질문하게되면 관계 직원의 조사에 의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1월22일자 취리히 신문의 인물동정 난에서 『「막스·프리시」가 체중을 줄이기 위해 부힝거병원에 다시금 다녀갔다. 크리스머스 전에 육중한 체중으로 입원했으나 신년에 비교적 가벼운 몸으로 퇴원했다. 그의 살빼기 프로그램은 단식과 사우나, 그리고 요가였다』는 내용을 읽은 뒤 그를 만나러 갔다.
「프리시」는 취리히호가 내려다보이는 중심가 벨뷔 언덕배기의 아름답고 호화로운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천식과 과다체중으로 시련을 겪고 있다는 그는 곧 모스크바 여행을 떠날 예정이지만 건강이 그곳 추위를 이기지 못할까 염려스럽다고 말했다. 글을 쓰지 못하는 권태로운 생활과 「고르바초프」를 지원한다는 두 가지 이유로 소련여행을 결심했단다.
「프리시」는 건강이 나빠 86년 가을 미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노이슈타트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음에도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필자와의 대담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읽고 나를 알기 위한 충동을 실현시키는 일이다. 즉 숨어 있는 나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글이 될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글을 쓰는 것은 이처럼 매우 어려운 일인데 이런 건강으로는 무리다. 그래서 일기도 쓰지 않는다.
쓰면 지난 것들이 되풀이된다. 앞으로는 혹시 정치에세이나 쓸는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82년에 나온 소설 『색마 블라우바트』다. 필자는 그의 『문학스케치북』 Ⅰ, Ⅱ권의 번역출간 허가를 받고 그와 작별했다. 귀국 길에 서독에 들러 「하인리히·뵐」의 아들 「르네·뵐」이 경영하는 라무브출판사를 찾았다. 「뵐」의 미망인 「안네마리」여사도 만났는데 그녀는 현재 진행중인 「뵐」의 해설판 전집작업에 열심이었다.

<뵐 손녀에 유언 시 남겨>
「뵐」의 유고는 대단히 많다. 판독하기 힘든 필적도 많다. 적어도 7, 8년 걸릴 작업이다. 초기 작품이지만 82년에 비로소 출간된 사랑의 소설『유언』을 한국어로 출판하기로「르네」와 계약했다. 「뵐」에게는 아들 둘과 손녀 둘, 손자 하나가 있다. 임종하기 한 달 전 맏손녀 「사마이」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먼저 왔던 분들은 모두모두 멀리 돌아가셨다 하지만 그분들 모두가 너와 함께 있단다 우리는 멀리서 와서 또 가야 한단다 그러니 걱정일랑 말거라 귀여운 아가야! 너의 할아버지가>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뵐」의 생애와 작품전시회가 86년 모스크바국립문학박물관에서 한달 동안 열린바 있다. 곧 북경서도 열린다고 하며 우리 나라에서도 열린다고 듣고 있다. <중앙대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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