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급날을 기다리며|정현숙 <서울 구로구 구로 1동 685의 28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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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가계부의 현재 잔고난에 올려지는 숫자가 차츰차츰 줄어들더니만 어느새 0에 가까와 오는걸 보니 봉급날도 며칠 남지 않았나 보다.
6년 전 처음 결혼했을 땐 남편이 갖다주는 봉급 봉투를 받기가 왜 그리도 쑥스럽고 겸연쩍던지 간신히 받아서는 금액도 확인해 보지 않고 화장대 서랍 속에 곱게곱게 넣어 두었다간 다음날 아침 남편이 출근한 다음에야 겨우 펴놓고선 요리 조리 맞춰보면서 한달 예산을 짜곤 했었다.
그러나 요즘엔 컴퓨터로 찍혀 나온 쪽지 하나가 봉급 봉투를 대신해 줄뿐 아니라 현금으로 받지를 않으니 봉급날이라도 봉급날 기분이 안 난다.
그렇지만 1년 열 두 달 새로운 봉급날이 가까워올 때면 혼자 기와집을 짓느라 잠을 설치기가 일쑤다.
이번 달엔 큰 아이 유치원 입학식도 있고 하니 아이들 봄옷도 멋있는 걸로 한 벌씩 사서 입히고 나도 예쁜 블라우스 하나만 새로 사 입어야지….
그리고 커튼도 화사한 색깔로 바꿔 집안 분위기를 새롭게 연출해봐야겠다. 건강이 안 좋은 그이를 위해서는 보약도 한 제 지어드려야 할텐데…기타 등등…. 정말 끝이 없다.
이런 상상들을 하며 즐거워하는 나 자신이 한편으론 한심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지만 어쩌면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하다.
꿈과 기대로 잔뜩 부풀었던 마음은 다음날 이 은행 저 은행을 누비며 융자금 갚고, 각종 공과금 내고, 적금 붓고, 또 남편 몰래 만들어 둔 나만의 예금통장에도 조금 떼어 넣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쪼글쪼글 줄어들기 일쑤다.
그래서 다시 모든 걸 까마득하기 만한 다음 봉급날로 미뤄둔 채 통장의 늘어가는 숫자에 만족해하며 그 몇배의 기쁨을 맛보는 내가 아니던 가…. 그러고 보면 우리의 삶이란 것은 시선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아주 즐거운 것일 수도, 아주 괴로운 것일 수도 있나보다. 어쩔 수 없이 아등바등 살게 되기는 하지만 좀더 긍정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멋진 신세계」는 어디에나 있을 듯 싶다.
설령 이번 달에도 가득 꾼 꿈들이 또 그렇게 공수표로 날아가 버린다 할지라도 봉급날을 기다리는 내 마음은 끝없이 끝없이 부풀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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