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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시민을 기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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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주헌 미술평론가

이주헌
미술평론가

‘최순실 사태’로 나라가 어지러운 가운데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사업추진위원회(추진위)가 박 전 대통령의 동상을 광화문광장에 세우겠다고 발표해 논란이 일었다. 서울시가 “광장을 만든 취지에 어긋난다”며 불허 방침을 밝혔으나 그렇다고 추진위가 계획을 완전히 포기한 것 같지는 않다. 이왕 논란이 불거졌으니 박 전 대통령이든 다른 누구든 서울을 대표하는 광장에 꼭 예스러운 권력자의 동상을 세우는 게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는 좀 따져보고 싶다.

광장의 권력자 동상

동상(銅像) 하면 사람들은 지도자 혹은 위인 등의 인물상을 먼저 생각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동상은 주제와 관계없이 구리라는 재료에 초점을 둔 말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돌이나 쇠로 만든 인물상은 동상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미국 링컨기념관에 있는 링컨상은 링컨 동상이 아니라 링컨 석상이다. 그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걸 링컨 동상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관행적으로 동상이라고 부르는 인물 전신상을 영어로 ‘스태추(statue)’라고 한다. 어근이 되는 ‘stat’가 ‘서다’라는 의미를 지닌 데서 알 수 있듯 설 수 있는 존재, 곧 인간과 동물 같은 생명체를 몸의 부분이 아닌 전체로 표현한 조각이고, 그것들의 위엄이나 영광·힘·희로애락 등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 조형물을 가리킨다. 재료가 무엇이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경북 구미시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 동상. [중앙포토]

경북 구미시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 동상. [중앙포토]

스태추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선사시대와 고대의 신상에까지 이른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 스태추는 숭배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꼭 신의 이미지가 아니더라도 영웅이나 위인을 조상(彫像)으로 세워놓으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 대상에 대한 숭모의 감정을 갖게 된다. 그래서 역사 속의 수많은 권력자가 자신의 스태추를 세웠다. 이렇듯 근원적으로 정치적인 요소를 지닌 조각이기에 권력이 바뀌거나 권력자에 대한 평가가 변하면 스태추들은 끌어내려지고 파괴돼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그렇게 레닌과 스탈린, 후세인, 이승만의 조상이 파괴됐다.

사실 문화사적으로 보면 레닌이나 스탈린의 조상은 매우 아이러니한 조형물이다. 지배계급을 소멸시키고 계급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과거의 전제군주처럼 숭배의식을 조장하는 스태추를 나라 곳곳에 세웠으니 말이다. 명분이 어떻든 모든 독재는 필연적으로 우상화를 조장하는 스태추를 낳게 된다.

스태추가 갖는 이런 독특한 성격 때문에 현대에 들어서는 중요한 광장에 당대의 지도자들을 이같이 예스러운 조상으로 세워 추앙하는 나라가 드물다. 군주가 주권자이던 과거에는 권력자 상을 중요한 공공장소에 높이 세워 우러러보게 했지만, 시민이 주권자인 오늘날 그런 조형물은 민주주의 정신과 맞지 않는 느낌을 주고 그만큼 미학적으로도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더구나 논란이 심한 인물상을 세우는 것은 국민 분열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되기 쉽다. 광장은 본래 시민이 주인인 공간이다. 굳이 조형물을 설치한다면 차라리 나라의 독립과 통일, 민주화를 위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져간 시민들의 얼을 기리는 조형물을 설치하는 게 100배 나을 것이다.

이 주 헌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