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 레터] 냉정 같은 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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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국정 농단 파문의 몸통인 최순실씨가 결국 구치소에 갇히는 몸이 됐습니다. 분노와 수치심의 구렁에 빠진 국민에게 최씨의 수감만으로 분풀이가 될리는 만무합니다. 탐욕에 젖은 한낱 개인의 단죄를 넘어 국정 농단의 실체가 낱낱이 규명되는 게 국민이 진정 바라는 것이겠지요. 요즘 최씨에 빗대 느닷없이 인구에 회자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러시아 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한 요승 라스푸틴과 고려 공민왕 때 요승 신돈이지요. 대통령을 쥐락펴락했다는 의혹을 받는 최씨와 묘하게 오버랩되기 때문일까요. 모르쇠와 부인으로 일관하는 최씨에게서 과연 검찰이 얼마나 진실을 밝혀낼지 국민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마당에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은 최순실 국정 개입과 관련해 검찰이 수사 중이니 실체적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나라를 위해 냉정을 지켜달라고 언론에 요청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의혹이 양산되면서 외신들까지 가담하고 있다면서 말입니다. 얼핏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선후가 잘못됐지 싶습니다. 냉정 운운에 앞서 청와대가 먼저 수사를 받겠다고 나서는게 옳은 수순으로 보입니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대통령이란 지적을 염두에 둔다면 말입니다. 정 대변인의 냉정 발언에 영화 제목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가 겹쳐진다는 사람이 많을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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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도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의 파장이 작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꼭두각시로 조롱거리가 되면서 교포들 사이에선 자존심 상하고 창피하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합니다. 일본 언론들은 자칫 한국의 국정 마비가 동북아 외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 정부가 정치의 투명성을 촉구하는 국민의 비판을 수용해 체제를 고칠 필요가 있다는 충고까지 합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일 터이지만 정치권이 제대로 새겨들어야 그나마 약이 될 터입니다.

최순실 사태의 불똥이 기업으로도 튀는 형국입니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설립에 돈을 댄 기업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검찰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기업들은 피해자라고 볼멘소리를 합니다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환골탈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습니다. 아직도 기업 주위를 어른거리는 정경유착의 그림자가 한심스러울 테지요. ‘최순실 사금고’로 전락할 뻔한 두 재단의 설립을 청와대가 지시하고 전경련이 총대를 맨 정황이 사실로 드러날지는 검찰 수사에 달렸습니다. 다만 차제에 전경련의 존재 이유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변화를 도모해야 하는 건 재계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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