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지금처럼 대통령 진정성 의심받으면 개헌 어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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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국회 시정연설에서 적극적인 개헌 추진 의사를 밝혔지만 국민은 진정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카드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박 대통령은 연설에서 국정 발목을 잡는 최순실 게이트, 우병우 민정수석 의혹 등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최씨와 관련된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은 사건이 불거진 뒤 한 달 만에야 검찰이 비로소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지만 최씨 모녀가 외국에서 종적을 감춘 뒤다. 우 수석은 국회 국정감사 증인 출석을 거부해 야당은 물론 여당으로부터도 공분을 샀다. 검찰·청와대의 이런 행태, 의사 결정이 박 대통령과 관계없이 이뤄진다고 보는 국민은 드물다. 이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은 국회에 예산안과 법안 처리 협조를 요청했고, 또 개헌을 들고 나왔다. 그러니 눈덩이처럼 커지는 최순실 의혹 등에서 비켜 가려는 노림수란 의심을 사는 것이다. 당장 야권은 “대통령은 최순실 국정 농단에 대한 사과부터 하라”는 반응을 내놨다.

개헌은 국가 현안을 한꺼번에 삼켜버리는 ‘국정 블랙홀’로 불린다. 박 대통령 스스로 그런 논리로 정치권의 개헌 논의에 제동을 걸어왔다. 노무현 정부 때 개헌 얘기가 나오자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비난한 것도 같은 논리였다. 하루아침에 입장이 바뀔 순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권력에 대한 불신을 벗겨내려는 노력도 함께 나와야 했다. 국론 분열의 원인이 되고 있는 최순실·우병우 의혹 등 현안에 대해 허심탄회하고 소상한 설명은 당연한 일이다. 국정 최고책임자가 국민의 대의기관 앞에 선 시정연설이 좋은 기회였지만 박 대통령은 해야 할 말은 않고, 하고 싶은 말만 한 셈이다.

개헌이 국정농단 의혹을 덮기 위한 꼼수란 의심을 받으면 개헌도 어려워진다. 개헌을 향한 대통령의 충정과 진정성을 느끼게 하려면 국민의 불쾌지수를 높이는 여러 잡음에 대한 깔끔하고 투명한 정리가 선행돼야 한다. 꼬인 정국이 살아나고 국론 분열이 해소되는 길이다. 그래야 개헌도 이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