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자의 인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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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피의자는 먼저 구속부터 하는 것이 형법이나 사법제도의 기능이 아니다.
피의자를 구속하지 않으면 사회질서가 파괴되거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지도 모를 위험한 경우에 한해, 그것도 최소한도로 제한해 격리하는 것이 형벌제도의 목적이다.
특히 구속제도는 범죄 피의자가 일정한 주거가 없고 증거를 없애거나 도망갈 염려가 있을때 부득불 일정기간 인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예외적 조치다.
그러나 검사의 심층수사에서 당초수사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거나 정상을 보아 당초의 구속판단이 경솔했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또 재판과정에서 판사가 피고인을 직접 만나 심문을 해보고 변??의 기회를 주었더니 조서만 보고 구속영장을 발부했던 당초의 조치가 온당치 못했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피고인의 질병정도로 보아 더 이상 구속상태에 둘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에 대비해 인신을 풀어주는 장치가 있는 것이다.
이같은 장치가 얼마나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느냐에 따라 그 나라가 인권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느냐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구속 피의자나 피고인을 풀어주는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불충분하다는 지적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예컨대 검사가 기소하기 전에 구속피의자의 죄질이 가볍다거나 범죄혐의가 없다고 스스로 판단할 경우 구속을 취소할 수 있다.
법원 역시 구속의 적정성을 심사해(구속적부심사제) 인신 구속을 해제할 수 있고 기소 후에도 보석, 구속집행 정지 등으로 석방을 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구속적부심사제도가 모든 구속 피의자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우선 구속적부심을 이용하려면 적지 않은 변호비용을 부담해야하니 서민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검사가 직접 인지한 사건이나 내란·외환·국가모독·국가보안법 등의 위반자나 5년 이상의 징역 등 무거운 범죄피의자는 이 심사제도를 이용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제한규정은 헌법이 명백히 하고 있는, 모든 피고인은 유죄의 확정판결 건에는 무죄로 간주한다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또 불구속을 원칙으로 하고 「구속」을 예외로 하는 형사소송법의 입법정신에도 어긋난다 하여 오래 전부터 법조계에서 개정의 필요성이 주장되어 왔다.
재판을 받아 보아야 죄가 있는지 여부를 알수 있는데 심지어 기소도 하기 전에 검사가 징역 5년 이상의 중죄에 해당한다는 등의 전제 아래 판사의 구속적부에 대한 심사기회 마저 주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대한변협이 인권옹호와 법률문화의 선진화를 위해 신원 보증금제의 실시를 골자로 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마련, 법무부와 국회 등에 건의한 것은 바람직한 조치다. 이 제도는 피의자의 범행정도와 환경·자산 등을 고려해 피의자가 수사기관이나 법정에 출석을 보장할 정도의 보증금을 영장에 기재하고 이를 예치했을 때 구속을 면제하는 것이다.
이 제도는 미국을 비롯해 선진 여러 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성공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불필요하고 부당한 구속이 해마다 검찰자체분석에서도 지적되고 구속남용이라는 비판이 없지 않는 현행 사법운영의 현실에 비춰 보증금제의 도입은 빠를수록 좋다. 구속이 수사편의나 징벌의 수단으로 잘못 이용되는 폐혜를 막기 위해서도 사심 없는 변협의 건의가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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