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여자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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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일요일 아침, 오랜만에 한가하게 마루에 혼차 앉아 차 한잔 마시면서 신문을 뒤적거리는데 전화벨이 울린다.『여보세요!』
앳된 여학생의 카람카랑한 목소리다.『얘. 지영아! 너, 일요일인데 벌써 일어났구나』
지영이는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다. 아들을 찾는 전화다. 쉴새없이 저쪽에서 말을 계속한다.『지영아! 너 어제 화났었지! 어제는 미안했어!』
지영이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방문이 잠긴걸 보니.『지영아! 왜 대답안해! 너 아직 화 안풀렸구나!』
이거 큰일 났다. 아니라고할 틈도 주지않고 있다. 난 순간적으로,『아-니…』
사실 내가 화난것은 아니니까 아니라고 할수밖에 없었다.『화 풀렸다니 고마워. 그런데 왜 아무말도 안하니!』
이거 큰일났다. 되도록 어른스럽게 목소리의 톤을 낮추면서, 그러나 나도 재미가 났다. 약간 장난도 하고 싶었다.『나, 사실 지영이 아버지야!』『야! 지영아, 까불지마. 어른 흉내내면 안돼!』
갈수록 태산이다. 이젠 할수 없다. 수화기에 대고 큰 소리로 아들을 불렀다. 그렇지만 아들은 나오지 않는다. 잠이 깊이 들었나보다.『저, 지영이가 아직 자고 있는데 누구에게서 전화왔다고전할까?』『지영아! 기분나빠. 전화 끊겠어!』
전화가 끊어졌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혼자 계속 웃었다. 통쾌할 정도로 큰소리로 웃었다. 기분좋은 일요일이다.
요즘 와서 내 옷이 한두개씩 없어진다. 내가 좋아하는 티셔츠가 찾을때마다 없다. 아내는 그럴때마다『빨려고 빨래통에 넣었나!』하면서 아들방으로 건너가서 내 옷을 들고 나오면서『빨려고 그랬는데…』라고 우물우물한다.
난 그럴때마다 참을성 없이 꽥 소리친다.『지영이녀석! 내옷 주지마!』
왜 아들 녀석은 내가 좋아하는 옷만 골라가며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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