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웃거나, 화내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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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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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
사회2부 부데스크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웃거나, 화내거나. 미국 대통령 후보라는 막중한 위치와 시정잡배급 저속한 표현의 극단적 대조가 ‘개그 코드’로 작동한다. 노골적인 남성 우월주의와 성차별은 사람들에게 혐오(또는 분노)를 유발한다. 그런데 만약 그가 미국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면(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웃거나 화내는 것으로 끝낼 수가 없다.

중국 또는 중국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대체로 둘로 갈린다. 웃거나, 짜증내거나. 인터넷으로 유통되는 중국 뉴스의 대부분은 ‘세상에 이런 일도’ 부류다. 사람이 많아서인지 믿기 어려운 황당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다 중국 정부가 우리에게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면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다. 사대·조공·청나라 이런 단어들이 기사와 댓글에 쏟아진다. 중국 관광객도 뭔가를 팔아서 이득을 남기는 이들에게는 기쁨의 대상이고, 그 밖의 보통 사람들에겐 불편 유발자다. 그 사이에서 손님에 대한 올바른 응대의 문제는 실종된다.

한창 진행 중인 국정감사도 그렇다.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분명한 사실은 ‘MS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다’는 것이다. 이를 상기시켜 준 이은재 의원은 많은 시민이 오래 기억할, 웃기거나 화를 내도록 하는 데 성공한 정치인이 됐다. 나날이 떨어지는 우리나라 교육의 경쟁력, 점점 커가는 교육격차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웃기지 못했고, 분노 유발용 폭로도 없었기 때문이다.

원자력발전소 옆에 언제든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 단층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는데도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얘기하지 않는다. 정치인들도 멀뚱멀뚱 보고만 있다. 절대로 웃길 수 없는 사안인 데다 자연현상과 관계돼 있어 분노를 겨냥할 대상도 마땅치가 않으니 소재로 인기가 없다.

대학에서는 학교사업에 대한 반대로 학생들이 집단행동을 하고 있다. 자신들의 의사를 무시해 화가 났다고 한다. 학교 밖에는 청년들의 미래 생존권이 달린 문제가 널려 있지만 그들은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 ‘극혐’ 대상인 ‘진지충’이 되느니 웃기는 뉴스 퍼나르는 게 이롭다고 여기는 듯하다.

프랑스의 천재 학자 자크 아탈리는 ‘우리는 박장대소하다 죽을 것이다’(본지 9월 23일자 칼럼)라고 경고했지만 우리나라에선 웃다 세상을 떠나는 이만큼 혼자 화내다 죽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이상언
사회2부 부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