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개헌「터널의 끝」이 안 보인다|3당대표 연설서도 극단적인 시각 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이번 정기국회의 3당대표 연설에서는 여-야 모두가 마치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이 우리 정치의 낙후성을 개탄하고 자괴했다.
여야는 이 같은 자생이 아시안게임을 통해 절실히 체득되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지금이라도 심기 일전하지 않으면 정치가 국가발전의 저해요인으로 지탄받을지 모른다는 데까지 인식을 같이 했다.
그러나 정작 온 국민이 해답을 기다리는 합의개헌의 전망에 관해서는 새로이 희망을 걸 만한 아무런 구체적 표징이 없었을 뿐 아니라 제시된 여야의 논리대로라면 타협의 가능성은 거의 무망한 형편이다.
이번 연말까지 국회에서 여-야가 함께 개헌안을 만들자는 약속은 허공 속의 수사로 계속 맴돌고 대결의 논리가 한치의 변화 없이 되풀이되었기 때문이다.
불과 2개월의 시한을 남겨 놓고 지금쯤은 구체적인 양보와 타협안에 관해 줄다리기를 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아직도 양측은 완승을 향한 출사표만 읊조리고 있는 느낌이다.
다만 이처럼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대립 양상의 지속이 자칫 파국을 부를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위기의식을 피차 갖고 있음이 좀더 노골적이고 실감나게 언급된 점이 특이하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당리당략으로 합의개헌에 진전을 보지 못하면 국민적 회의가 고조되어 우리정치인의 존립기반 자체를 위협할 것이며 정상적인 헌정질서는 파국에 직면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고, 이만섭 국민당총재는 한술 더 떠『합의 개헌을 못하면 어떤 형태로든 파국이 올 것이며 그때는 현 정치지도자들 모두가 물러나야 할 것』이란 비감을 피력했다.
이민우 신민당총재도 파국이니「판 쓸이」란 말에 언급하면서『그런 사태는 바라지는 않지만 그 두려움 때문에 직선제를 포기할 순 없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마주 보는 두 기관차가 부딪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지만 아직은 충돌의 비극보다는 상대방의 멈춤을 기대하며 달려가고 있는 형국이다.
따라서 민정당과 신민당은 각기 내각책임제와 대통령직선제를 상대방이 받는 것만이 타협이요, 진짜 민주화란 확신(?)위에 모든 주장과 제의를 입론했다.
민정당은 특히 의원내각제가 왜 우리사회의 공존공영을 보장하는 제도인가에 대한 논리전개에 높은 비중을 할애했다. 이를테면 다원화된 사회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추구하고, 1인 장기집권을 막으면서 국민의 정부선택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혁신세력을「체제 내적 이견 자」란 비판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도 내각제가 되어야 하며, 잘 사는 선진국이 대부분 내각제이니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선택은 이것밖에 없다는 식이다.
또 한민당 이래 줄기차게 내각제를 주장해 온 야당이 막상 필요한 시기에 외면하는 것은 만년야당의 무책임한「명분 투쟁주의」적 속성이라고 공박했다.
아울러 민정당은 민주주의를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현행 헌법으로 돌아가겠다는 뜻도 아니고 1인 장기집권을 획책하는 것도 아닐 뿐 아니라, 내각제의 근간을 건드리지 않고 수정 제의 해 오면 타협할 용의가 있으며 공정한 국회의원선거법을 마련할 테니 내각제로 타협하자고 촉구했다.
그러나 신민당은 논리의 출발부터가 달랐다. 대통령직선제의 양보는 국민과의 약속을 배반하는 것이며 여당이「민의」를 거역하면 나라의 명 운이 어렵게 된다는 도식을 되풀이하고 내각제를「일당 장기독재음모」라는 시각에서 분석하고 이를 거증 하려 했다.
예컨대 내각제를 내세우면서 국회의원선거법을 내놓지 않는 것은 그들의「음모」를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것이며 내각제는 집권당의 당헌·당규로 1인 장기독재를 할 수 있는 제도라고 몰아붙였다.
이민우 총재는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집권당의 대권을 장악함으로써 실권을 행사하고 있는 버마의「네윈」을 염두에 둔 듯『당권을 잡은 사람이 수상까지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는 제도』 라고 민정당의 내각책임제 안을 비판했다.
이 같은 문제인식을 바탕으로 신민당은『야당엔 엄청난 위험부담이 있는』선택적 국민투표를 하자고 제의했고 이에 대해 민정당은『헌정질서의 문란을 시도하는 발상』이라고 일축했다.
이렇게 볼 때 3당대표연설은 파국의 가능성을 걱정만 했을 뿐 국민에게 합의개헌에 대한 기대와 정치발전의 실마리를 유추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지는 못한 셈이다.
여야의 극단적 시각 차이는 사회·경제문제를 보는 데서도 마찬가지였다.
민정당은 좌경·용공세력을『산업사회의 그늘에서 성장한』 부산물로 파악한 반면, 신민당은 『건전한 비판세력을 법을 남용함으로써』변질시켰다고 간주했다. 그럼에도 양쪽이 모두 정치와 경제의 민주화로 이들을 제도권 내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처방전을 내고 있어 흥미롭다.
민정당은 지금의 경제적 호황을『제5공화국의 치밀한 경제관리』때문이라고 분석하고 『무책임한 파탄 론과 선동적인 망국론으로 우리 경제를 비판할 때는 지났다』고 선언했다. 반면 신민당은 부실기업정리·부동산 종합세제실시연기 등을 들어『전례 없는 정경유착의 야합』이 벌어지고 있으며 정권의 정통성이 약해 외국의 압력에 버티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양측의 기본자세를 볼 때 이번 정기국회가 합의개헌과 예산심의의 양이 되기보다는 짜증스럽고 비생산적인 대결이 속출하고 그로 인한 예측 불허의 사태가 빈발하는 정쟁의 무대가 될 가능성을 더 그게 예감케 한다.
다만 정기국회의 대표연설이란 것이 원래 협상카드의 제시라는 성격보다는 자기입장을 웅변(?)으로 과시하는 성격이라는 점과, 결론 적이라 기보다는 정기국회 또는 협상을 시작하는 일종의 출발신호라는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대표 연설에서 여야대림이 재삼 확인됐지만 그것이 앞으로 타협과정이나 협상시도 노력마저 무의미하게 만들 것이라고 속단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정면대결의 강도가 높은 만큼 위기의식도 그만큼 높고 협상의 필요성을 더 절실하게 느끼는 측면도 대표 연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여야 어느 쪽도 자당의 개헌 골격을 양보할 아무런 시사가 없지만 합의개헌의 시한이 다가옴에 따라 돌파구를 열고 파국을 피해 보려는 허허 실 실의 여-야 정치력 발휘시도도 어느 때보다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전육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