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두 대사 발언을 보는 여야시각|「한파」내습 설 겹쳐 정가 긴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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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가을정국의「한파내습 설」이 심심찮게 나돌더니 기어이 서울주재 미국대사와 워싱턴주재 한국대사가 우연치고는 기묘하게도 같은 날 같은 맥락의「경고 성 발언」을 해서 내외에 파문을 던지고 있다.
5년 3개월의 임기를 마치고 곧 떠나는「리처드·워커」주한 미 대사는 지난달 30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지와의 회견을 통해, 그리고 김경원 주미대사는 같은 날 워싱턴의 존즈 홉킨즈 대 국제문제연구소에서「한국, 88년과 그 이후의 전망」이란 주제 연설을 통해 각각 아주 미묘한 발언을 했다.
「워커」대사의 발언은 한국은 이번 개헌협상에서 실패한다면 △정치적으로 20년은 후퇴할 것이며 △계엄령이나 또 다른 쿠데타가 재발할 우려가 주한외교관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고 지적, △한국지도자들의 협상에 의한 타협책임을 강조하면서 △미국은 중립적 위치에서 지켜본다는 일관된 정책을 갖게 될 것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김 대사 발언은 △88년 봄까지 한국이 안정을 되찾지 못할 경우 역사는 10년 이상 후퇴하게 될 것이며 △88년까지의 과도기에 정부는 법과 질서의 와해를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취하지 않을 보다 엄격한 조치(firmer measure)」를 취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같은 두 사람의 발언에 대해 여야는 겉으로는 다같이 대사로서 할 수 있는 말인가, 특히「워커」대사의 발언은 주재국에 대한 내정간섭 적 발언이 아닌가 하는 등의 반응을 보이면서도 내심 비상한 관심과 판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야당 측은 두 대사발언의 진의와 그 배경에 대해 의혹을 갖고 주시하며 다소 긴장감을 보이는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인 반면 여당 측은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지만『불감 청이나 고소 원』이라는 태도가 지배적이다.
두 대사발언에 대한 여-야의 종합적 시각을 정리해 보면 우연치고는 너무나 같은 시기에, 특히 상황적으로 국내 정 청이 혼미해질 것으로 예측되는 가을정국에 앞서 같은 맥락의 경고를 했다는데 주목하고 있다.
상당수 의원들은 두 대사의 발언내용 이면에 숨겨진 뜻으로 대야경고성의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한미정부간에는 사전에 어느정도얘기가 있은 게 아닌가, 적어도 비슷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 않겠는가…등등의 추측을 하고 있다.
여당의원들은「워커」대사의 발언을 고도로 계산된 정치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한 소식통은『떠나는 대사라고 함부로 말했다고 생각할 수 없으며 미국의 이익이 어느 쪽에 있다는 걸 면밀히 검토한 후 나온 선택의 방향을 명시한 미국정부 입장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한 고위당직자도『소련조차 88년의 한국정권교체가 중대 행사라는 인식 하에 안정된 정권 (solid government)의 수립을 바라는 형편이더라』며『항 차 미국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야권에 민감한 반응과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여당의원은『미국이 전에는 김대중씨 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고 인권문제를 거론하더니 이제 전환기에 처하니까 미 국익의 중량이 실린 쪽을 택하는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상당수 야권인사들도 내심으로는 여당의원들과 비슷한 판단을 하는 것 같으나 두 김씨는 애써 이를 축소 해석하려는 경향인 듯하다.
김대중씨는 즉각적 논평을 보류하고 있고, 김영삼씨는『한마디로 망발』이라며『지금은 80년과 상황이 다르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두 김씨 진영과 재야의 반응은 한마디로「워커」대사의 발언은 대 국민·대 야권 발언이다』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허경구 의원(신민)은『미국은 한국 야당이 민주화와 직선제개헌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으려다 가는 파국을 초래할 우려도 있으니 여당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도 결국은 민주화가 된다는「충언 적」시사임과 동시에「파국」이 올 경우에 나올 한국정부의 사후조치를 내외에 정당화시키는 신호』라고 냉정하게 분석했다. 허 의원은 국내에 반미무드가 젊은 층에 퍼지고 있는데도「워커」대사가 그런 말을 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 야당중진은『80년5월 광주사태직전 당시「글라이스틴」주한미대사가 몇몇 여-야 의원들을 초청,「워커」대사와 비슷한 말을 한바 있다』고 상기시키고는『지각에 변화가 있으려면 파충류부터 움직이는 생태계의 현상처럼 한국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가진 미국대사의 말에 뭔가 조짐이 좋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재야 측은『미국은 자국이익상 한반도의 안정을 바랄 것이며 따라서 버겁지 않은 현정권을 지지하는 방향이어서 혼란이 예상되자 대 국민·대야엄포용으로 던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신민당 내 비주류 측과 주류 측 다수의원들은「워커」대사의 발언을 좋지 않은 조짐이며 의원내각제로의 타협종용으로 받아들여 경계하는데 반해, 두 김씨를 포함한 주류 측 상층부는 대야엄포용으로 애써 축소 해석하면서 격렬히 비난하는 양상으로 구분되고 있다.
또 김 대사의 발언에 대해서도 다수 여야의원들은 한-미 양국정부간에 한국의 상황전개에 대응하는 모종의 묵계 내지는 이해가 성립된 것으로 판단하는 경향이다.
여당 측의 한 소식통은 김 대사의 그 발언이 자기의견을 말한 것으로만 볼 수는 결코 없다고 지적, 당연히 정부와 사전 협의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한-미 양국 정부간에 그런 이해를 공유할 바탕이 마련됐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았다.
허경구 의원은『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조차 파국이 올 수 있다는 경고를 했을 뿐인데 김 대사는 파국이후의 힘 행사 가능성을 말해 야당 측에 타협을 종용하는「경고」를 했다』고 말하고『김 대사의 그 같은 공언은 미국이 충분히 그런 사태를 인지·이해하고 있음을 야 측에 시사한 행위』라고 분석했다.
여야는 다같이「워커」대사가 쿠데타 발발 가능성이니, 계엄령이니 하고 언급한데 대해서는 불쾌해 하는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김 대사가 말한,「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취하지 않을 보다 엄격한 조치」가 무엇일까 하는데 대해서는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혼란이 벌어질 경우 정부가 취할 수 있는 비상한 조치로는 헌법 51조에 따른 대통령의 비 상 조치 권 발동, 52조의 계엄령발동 등 이 가능하고 그밖에 위수령발동도 생각할 수 있다. 헌법51조는「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교전상태나 그에 준 하는 중대한 비상사태에 처하여 국가를 보위하기 위하여 급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에는 내정·외교·국방·경제·재정·사법 등 국정전반에 걸쳐 필요한 비상조치를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이 경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게 돼 있다. (51조②)
그러나 여-야는 이런 조치를 발동할 상황이 도래할 것으로는 믿지 않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 경향인 것은 물론이다.
아무든 두 대사의 발언은 앞으로의 정국전개와 관련, 여야에 다같이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며 파국을 피해 가려는 여야의 강한 심정 대를 두텁게 할지도 모른다는 관측이다. <이수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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