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의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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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정치가의 조건은 무엇인가. 고대그리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식견·웅변술·청렴·애국심등 네가지를 정치가의 조건으로 꼽았다. 사회학자 「막스·베버」는 1919년의 유명한 강연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가로서 결정적으로 필요한 세 개의 자질로 정열·결과윤리적 책임감과· 장래를 내다보는 동찰력을 들었다.
그런가하면 개성·인간관리능력·행동력·비전등 네가지 조건을드는 학자도 있다.
「페리클레스」가 말한「식견」이란 국정전반에 걸친 종합적 인식과 종합적 판단능력을 일컫는다. 고대 동양사람들이 생각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란 개념도 비슷한 맥락의 말이고 「막스·베버」의 동찰력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보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나라의 일, 세계의 일에 관해 그 현상과 미래를 통찰, 어떻게 하면 좋은가의 판단을 종합적 입장에서 내리는 능력은 동서고금을 불문, 정치가가 갖추어야할 으뜸가는 조건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페리클레스」가 내세운 청렴이란 조건이 왜 중요한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하찮은 미관말직의 공무원이라 해도 금전을 탐내고 주색에 빠지면 그 자체가 악덕이고 폐해가 큰 터에 정치가가 금품의 유혹에 지고 만다면 국정을 왜곡시키고 정치적으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은 뻔하다.「페리클레스」가 식견과 함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들고있는 것은 애국심이다. 그는 이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서는 다른 조건이 아무리 충족되어도 아무짝에 쓸모없다고 단언했다. 말하자면 애국심은 정치가의 혼이며 생명이라는 뜻이리라.
다만 스스로 보고 생각한 것을 일반국민에게 알리는 능력으로서 웅변술이 현대사회에서도 불가결한 조건인지는 의문이다.
「페리클레스」자신이 웅변가였고 서양의 정치가에 웅변가가 많은 것은 고대그리스처럼 전 시민이 모인곳에서 연설을 해서 군중을 움직여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수 있어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 국민을 한곳에모아 연설할수는 없고 TV·라디오·신문·잡지등 매스컴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 국민을 설득하는 길밖에는 없다. 이제 웅변술은 그다지 쓸모 있는 수단은 아니다.
더우기 근대정치는 정당과의 관계를 떠나서 생각할 수는 없게 되었다. 영국의 정치사상가 「에드먼드·버크」에 따르면 정당은 『어떤 특정한 주의나 원칙에 견해가 일치한사람들이 국익증진을 위해 결집한 단체』다.
반면 하버드대학의 「칼·프리드리히」교수는 『정당이란 그들의 지도자를 위해 국가의 지배권을 획득, 또는 보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것으로, 성원에 대해서는 그같은 지배를 통해 정신적·물질작인 우대와 이익의 확보를 목적으로 한 집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물론 특정한 주의나 원칙및 국익증진이란 두가지 점이 없으면 정당은 단순한 도당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명분을 앞세우는「버크」의 정의만으로 복잡한 현대정당의 행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다. 명예욕·권력욕과 같은 인간적인것 없이 정치가에게 정열을 기대할 수는 없다.
내세우는 명분 못지않게 진짜 속셈을 헤아리는 일이 중요하다. 욕망이 없이 정치를 움직이는 에너지는 생겨나지 않는 법이며 따라서 욕망이 없는 도피적인 성인군자에게는 정치가의 자격이 없다.
「막스·베버」가 「정열」·「결과 윤리적책임감」이라고 부른것은 정당의 이런 생리를 꿰뚫어 보고 내린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가의 조건은 이처럼 시대에 따라, 나라에 따라 다를수는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상장에서건 대세나 민의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동찰력만은 빼놓을 수 없는 조건임에 틀림없다. 정당을 이끌어야할 지도자로서 인간 관리능력과 행동력도 특출해야한다. 애국심은 정치적 무지 때문에 또는 다른 목적으로 악용된 일이 많아 인상이 좋지 않은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정치가라면 반드시 갖추어야할 조건이다.
88년은 어떤 의미에서건 우리나라 정치사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전대통령이 그때 정권을 내놓으면 정부형태가 어떤 것이 되건 누군가 이 나라 정치지도자로서 등장하게 되어있다.
집권당쪽에서 부상된 인물은 있으나 「후계자」로서 확정된 단계는 아니다. 기수가 확정 안된것은 야당쪽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치일정이 예정대로 진전되면 여야의 기수가 누군지는 조만간 판가름나게 되어있다.
되돌아보면 우리의 정치무대에서 정치인(Politician) 은 많았어도 정치가 (Stateasman)는 지극히 드물었다. 정치지도자가 정치가로서의 조건을 구비했는지 따질 기회도 거의 없다 시피한것이 우리 헌정사의 불행한 단면이기도 하다.
정치가가 없어서 정치상황이 오늘처럼 되었는지, 우리의 특수한 정치 상황때문에「식견」 있는 정치가가 출현하기 어려웠는지 따질 겨를은 없다. 그러나 대세가 정치의 영역과 비중을 높여주는 쪽으로 가고있는 것만은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대통령중심제가 되든 내각책임제가 되든 국민의 정부 선택권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다른 분야도 다 그렇지만 특히 정치지도자의 개성·행동력·비전은 물론 일거수일투족은한 나라의 명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런 뜻에서 이제부터는 정치가의 조건을 따지는 일은 국민 모두의 적극적인 관심사가 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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