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소 "한미약품 공시, 의지만 있었다면 일찍 할 수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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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약품이 자신들의 실수(?)를 우리 측 잘못으로 물타기 하려는 것 아니냐.”

한국거래소 관계자의 격양된 반응이다. 한미약품이 “8500억원짜리 기술 수출 계약 해지에 관한 공시가 늦어진 것은 거래소와 공시 협의 과정에서 발생한 지연”이라는 취지로 발언에 한 데 대해서다.

김재식 한미약품 최고재무책임자(CFOㆍ부사장)은 2일 기자회견에서 “베링거인겔하임으로부터 9월29일 저녁 7시 6분에 계약해지 사실을 메일로 통보 받았다”며 “공시가 다음날 장 시작 후 29분이 지난 9시 29분에 이뤄진 것은 (고의가 아니라) 거래소 공시 승인 과정에서 면밀한 검토를 거치게 돼 있어 시간이 지체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다시 말해, 의도를 가지고 늑장 공시를 한 것이 아니라 거래소의 공시 시스템 자체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라는 취지로 해명했다.

거래소 측은 그러나, 이 같은 해명이 애초에 말이 안 된다는 입장이다. 먼저, 현재 공시 시스템에서는 ‘거래소 승인’이라는 절차 자체가 없다. 채현주 유가증권시장본부 공시부장은 “우리나라 공시 시스템은 ‘자율 공시’”라며 “기업 공시 담당자가 공시시스템에 공시 사항을 입력하면 바로 공시가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히려 우리(거래소)가 공시 사항을 검토한다고 붙잡고 있으면 그 사이 정보가 새어 나가 불공정 매매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며 “기업 측에서 공시 시스템에 관련 사항을 입력하고 버튼만 누르면 그 정보는 거래소나 금융감독원, 투자자들 모두에게 동시에 전송된다”고 말했다.

채 부장은 “기업 합병이나 인수 등 공시 이후 거래정지 및 재상장 등의 시장 절차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가끔 관련자들이 이후 절차 협의를 위해 상담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며 “그러나 그 경우에도 시장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공시하도록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미약품이 수출계약 해지 공시를 내보내기 하루 전날에 내놓은 1조원 가량의 기술수출 공시는 거래소의 승인이나 상담 없이 바로 한미약품에서 공시했다.

거래소 측은 한미약품이 의지만 있었다면 충분히 장 시작 전에 대응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채 부장은 “한미약품 담당자가 담당 직원 휴대폰으로 처음 연락한 것이 9월 30일 오전 8시 30분, 직원이 부재중 전화 확인하고 8시 34분에 다시 전화한 뒤, 사무실에서 40분쯤에 만나서 얘기를 시작했다”며 “그 때 처음 얘기를 듣고 우리(거래소) 쪽에서 계속 한 말이 사소한 수정 사항은 나중에 정정 공시를 해도 되니까 일단 장 시작 전에 빨리 공시를 하라고 재촉했는데도 직원이 안(한미약품)에 얘기해야 한다고 뭐 하다가 9시 29분이 돼야 공시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미약품 공시 담당자가 우리 쪽 담당자 휴대폰 번호를 모두 알고 있다”며 “밤에 전화로 미리 알려주고 일 처리를 해도 됐고, 늦어도 다음날 아침 6시 당직자 2명이 출근했을 때 사무실에 전화해 알렸다면 장 시작 전에는 충분히 공시가 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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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호재성 공시 때문에 지난달 30일 5% 이상 상승 출발한 한미약품 주가는 악재성 공시로 장중 18%까지 폭락했다. 개장 직후 한미약품 주식을 매수했다면 하루 새 20% 넘는 손실을 본 셈이다. 이날 개인들은 2101억원 어치를 순매수, 외국인은 74억원 순매도, 기관은 2037억 원어치 순매도했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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