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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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창경궁 중건을 기념하는 경축행사로 임금의 행차가 복원, 재현되었다.
왕조시대의 번거로운 절차지만 인멸되다시피 했던 우리 문화의 한 분야가 되살아나 흐뭇하다.
『세종실록』에 보면 임금의 행차인「어가」에는 네 가지가 있었다.「대가노부(노부)」 「법가노부」「소가노부」「중궁노부」로 규모와 행렬 배치가 각각 달랐다.「대가노부」는 종묘에 제를 올리기 위해 나가는 임금의 나들이 행렬로 가장 큰 행렬이다. 거기엔 무려 9천5백 명의 인원이 참가한다.
「법가노부」는 7천5백 명 규모,「소가노부」는 4천5백 명 정도다.
임금이 같은 궐내의 중궁전에 나가는「중궁노부」때도 2백 명 규모의 행렬을 지었다.
임금의 행차에는 길을 인도하는 부령이 앞서고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에 이어 예조판서·병조판서·우군절제사·시위 군이 따르며 전부 고취·기장 대·장교단·동궁가마도 간다. 어련 주위에는 정5품 이상의 신하와 궁녀들도 따른다.
이번 복원 행차에는 1천4백62명이 참여했다.
그러나 조선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수원 현륭원에 행차하는 모습을 담은「능 행도」에는4천명의 인원과 말 6백 필이 참여했다.
한 달에 한번 꼴로 자주 있었던 정조의 화성행보에는 특히 한강을 건너는 일이 큰일이었다.
경강대선 80척과 격군 1천명을 동원해 한강에 부교를 가설하고 이를 관리도 했다.
이를 의해 주교 사라는 관청까지 생겼었다.
사냥을 좋아했던 연산군은 민선 8백 척으로 대교를 만들고 기마병들을 이끌고 자주 청계산에 나갔다.
임금의 행차에는「황룡 기」를 비롯해 깃발만도 수백에 이르러 국고의 낭비도 컸다.
하지만 임금의 행차는 백성들의 구경거리였고, 즐거운 축제의 하나였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조선통신사 일행 4백 여명이 일본에 드나들던 행차는 일본에 많은 축제 풍습을 남겼다.
조선야마(조선산거)라는 행렬은 지금도 보존 회를 통해 자주 재현되는 축제로서 지속되고 있다.
집단 축제행사는 민중의 단결과 협동을 진작하는 효과도 있다.
일제에 의해 억제되었던 집단 민속놀이들은 그동안 많이 재생되었지만 이번에「동가」가 복원, 재현된 것은 의의 깊다.
나라의 위신과 문화 국민의 자발적 축제 기풍도 되살아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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