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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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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나는 이중섭이 살아있을 적에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만 39세의 나이로 비극적인 죽음을 한 몇 해 후부터 신문기자 위치와 개인적인 관심에서 나는 그의 여러 측면을 잘 알고있는 화가와 문인들로부터 수없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간혹 그의 작품도 접하면서 이중섭 인식을 넓히게 되었다.
6·25전쟁을 기화로 북한에서 예술과 표현의 자유를 찾아 가족과 함께 남하한 후 불과 5년반동안에 이중섭이 남긴 완성·미완성·습작류의 유화·수채화·크레파스화·연필 및 펜화, 그리고 그림 재료의 궁핍 속에 기발하게 착상한 양담배갑 은박지 위의 선화등이 처음으로 상당수 한곳에 모아져 특별전이 개최된 것은 작가가 한스럽게 요절한지 16년째 되던 1972년이었다. 현대화랑(인사동 때)에서였다.
그 특별전에 시종 관계하고, 캐털로그에 작품 해설도 쓰면서 나는 이중섭 예술의 전모와 특질에 어느 정도 분석적으로 접근할 수가 있었다. 그 후에도 여기저기서 나타난 작품을 대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이중섭에 관한 에세이도 더러 쓰면서 나 나름의 작가 연구를 해온 셈이다.
지금 중앙일보 새사옥 호암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중섭 30주기기념 특별전은 그간 공개된바 없는 작품도 적잖이 포함된 지금까지 최대 규모로 구성되어 수많은 관객이 「이중섭 신화」의 실상을 보려고 몰려들고 있다. 이 기념전에서 나 자신도 새로이 인식한 것이 많다. 게다가 중앙일보의 이 난에 연재된, 과거 이중섭과 친밀했던 화지며 문인의 증언적인 글들도 이중섭 이해에 다각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그 동안에도 신문·잡지에 이중섭을 말한 글은 많았다. 다른 화가엔 그런 예는 거의 없다. 「이중섭 신화」는 거기서 형성된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글의 대개는 작품 자체의 창조적 특질과 표현적인 차원에 대한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기술보다는 천부적인 기재성의 일화나 그림에 얽힌 작가의 개인적 고뇌와 갈망과 실의의 이야기를 주로 쓴 것인데다가 글의 성격상 찬미쪽으로만 흐른 면이 많았다.
그렇더라도 그 내용들이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었던 만큼 많은 사람에게 이중섭이 전설화되고 관심을 끌게 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의 비극적인 생애와 직결되는 작품의 특이성과 표현상의 함축성 등을 다소라도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게 만들었다. 우리시대에 그렇게 화제가 될만하고 매혹적으로 이끌리는, 그리고 어떻든 감탄하게 하는 화가가 몇이나 되는가. 근래에 와서 이중섭이 지나치게 찬미되며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는 객관적인 냉철한 비평도 나오고 있는 것은 정당한 면이 있다. 이중섭의 모든 그림에 대한 무조건적인 절찬 일변도는 일반 사회의 인기를 말하는 것이며, 작품 자체의 엄정한 평가는 별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이중섭 예술의 진면이 창출되고 있는 어린이·가족·부부(한쌍의 닭으로 상징되는)·소·게·닭등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표현 수법의 작품들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높은 평가의 대상이다.
그러나 미완성에 그쳤거나 습작류 또는 희화로 보게 하는 것들까지도 무조건 절대시되고 있는 현상은 이중섭의 참다운 평가에 혼돈과 무분별을 만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면은 실은 이중섭에 관한 연구작업이 평론가나 관계 전문가들에게서 다각도로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면과도 관계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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