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그대 문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96호 34면

말더듬이 어릴 때 나는 약간 말더듬이였다. 지금도 흥분하면 간혹 말을 더듬지만 많이 나아져 동료들은 한때 내가 말더듬이였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말 더듬는 것 때문에 또는 말을 못해서 사회생활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말썽이다.


요즘은 느린 손 때문에 고민이다. 시간이 갈수록 카톡이나 문자 메신저로 의사소통을 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는데 나는 타자가 느리니까 말이다. 말하자면 나는 손더듬이다. 타자 치기 바빠 적절한 이모티콘 활용은 꿈도 못 꾼다. 가령 동료들이 메신저로 뭘 물어보는데 대답하려고 겨우 문자를 몇 개 칠 때쯤이면 그 사이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서 알았다거나 스스로 해답을 찾았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직장에서 뒤처지지 않고 소외되지 않으려면 손이, 손가락 움직임이 빨라야 한다. 아무래도 빨리 손더듬이 교정 학원이나 클리닉을 알아봐야겠다.


비대면 비통화 접촉시대예전 담당자는 직접 만나는 것보다 전화 통화를 선호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IT시대에 미팅을 하기 위해 찾아가거나 찾아오는 것은 시간낭비로 여겼다. 웬만한 것은 메일이나 통화로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직접 만나는 것보다 그쪽이 더 정확하고 효율적인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했다.


새로 바뀐 담당자는 통화보다 문자를 선호한다. 이쪽에서 전화를 하면 바로 받지 않고 문자나 카톡이 온다. 무슨 일이세요? 난감해 하는 내게 동료가 문자로 위로한다. 지금은 문자, 카톡, 메신저의 시대죠. 요즘 다들 통화보다 문자를 좋아해요. 그러니까 우리 시대는 ‘비대면 비통화 접촉시대’라고 할 수 있어요. 직접 대면보다 통화, 통화보다 문자죠.


간접사회 문명이란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면서 점점 더 멀어지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만, 그래서 우주가 계속 팽창하는 것일까? 아니, 우주가 계속 팽창하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매개체가 자꾸 들어서고 생기고 그런 것들이 점점 늘어나는 쪽으로 문명이 발달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명은 직거래를 좋아하지 않는다. 문명은 직접을 좋아하지 않는다. 문명은 간접이다.


먼 그대 서영은의 소설 『먼 그대』의 주인공 이름이 문자다. 오래전에 읽은 소설이라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고 주인공 이름과 그가 출판사에서 10년 동안 교정 업무를 담당했다는 것만 기억에 남았다. 문자를 보는 문자. 문자를 바로잡는 문자.


단체문자명절 때면 여기저기서 인사 문자가 온다. 보내오는 사람은 다른데 내용은 거의 같다. 아마 다들 복사해서 단체로 보내는 것이리라. 그 비슷한 내용의 단체문자에 어떤 것에는 답을 하고 어떤 것에는 답을 하지 않는다. 기준은 앞에 내 이름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단체문자가 분명해 보이지만 그래도 이름을 한번 불러주는 정성은 반갑고 고맙고 눈물겹다. 요즘은 이름 없는 단체문자도 점점 줄어드니까.


조만간명절 때나 무슨 날이면 그 후배는 꼭 전화를 합니다. 목소리로 찾아와요. 뭐 별 내용은 없어요. 이쪽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들려주고, 서로의 건강을 걱정하고, 즐거운 명절 보내라고, 그리고 조만간 한번 만나자고 약속하지요. 그렇게 그 후배한테서 전화가 온 게 한 10년은 되었지요. 그런데 ‘조만간’ 뜻이 10년 후쯤 되는 걸까요? 후배 본 게 10년은 넘은 것 같아서요. 국어사전을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보고 싶어서 안 만나요만일 누군가 페이스북 같은 데서 번개, 그러니까 즉흥모임 공지를 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공지에 가장 적극적이고 열렬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대체로 어떤 불가피한 사정으로 모임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불참을 애석해 하고 안타까워하지만 사실은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도하면서 간절하게 보고 싶다고 댓글을 다는 것이다. 만일 그도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특별히 모임의 장소와 일시를 변경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즉시 페이스북 연결을 끊거나 아예 한동안 휴대전화기의 전원을 꺼둘 것이다. 배터리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니까. 명절에도 사람들에게 전화는커녕 문자도, 단체문자도 보내지 않는 사람이 바로 나니까. ●


이윤정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