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비와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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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시국맹언에 서명했던 서울대교수 17명이 문교부의 연구비 지급대상에서 제외된 것을 계기로 우리 행정부와 대학의 권위가 다시 한번 진지하게 물어지고 있다.
「시국선언」은 그동안 사회적으로 논란이 분분했던 문제이지만 이미 정부·여당에 의해 민주화노력으로 널리 수렴되고 있는 만큼 새삼스레 문제될 것이 없다. 현실인식이나 선언문 자구의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으나 궁극적으로는 민주화의 테두리에 포함할 수 있는 문제들이라는 점에서 더 이상 용훼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도 지금 문교부가 그들 선언 교수들을 특별히 일반교수들에서 떼어서 불이익을 주려고 하고 있는 것은 새삼스럽게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격이 되고 있다.
행정권은 두말할 것이 없이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공권이다. 그 때문에 그 공권은 권위를 가지며 국민의 신인을 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행정권이 모호한 호악 기준이나 감정적인 듯한 인상으로 그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다.
더욱이 문교부가 대학교수에게 지급하기로 되어있는 「기초학술 조성연구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국민이 낸 세금에서 나온 예산이며 결코 어떤 특별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적인 돈이 아니다. 또 그 연구비는 교수들의 정치적 견해나 태도에 근거해서 분배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학문발전을 위해 지급된다는 명확한 원칙아래 운용되어 왔다.
서울대의 경우는 대학별 연구비 수혜 순서에 따라 대상자가 정해져왔다.
그런 만큼 문교부가 그 연구비 사용의 원칙과 대학의 관행을 못 본체하고 학문외적인 기준을 적용해서 연구비 지급을 독단하는 것은 대학의 권위를 손상한 전횡이라는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다.
서울대 교수들이 집단적으로 건의문을 통해 시정을 촉구하고 있는 것은 그런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다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우선 문교부가 행정권을 사권화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교부는 이번 서울대 교수들의 경우만이 아니라 작년에는 전남대 교수 2명에 대해 정부의 「학원안정법」제정계획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정기 승진에서 제외했으며 올해는 한신대 선언교수 1영을 국비 해외연수대상에서 탈락시킨바 있다.
그런 일들은 명분이 뚜렷하지 못하면 「감정적 보복조치」라는 오해와 함께 대의와 공익을 생각하는 권위 있는 조치가 아니라는 의심을 받게 된다.
또 서울대 당국이 교수들의 건의가 있을 때까지 남의 일처럼 문제를 방치하고 있었던 점도 떳떳하지 못하다.
대학의 권위는 결코 몇몇 교수들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신성한 교권을 책임맡은 이는 편견이나 감정이나 위압에 따르기 보다 대학의 존엄을 위해 헌신할 각오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기회에 사회가 자람과 사랑으로 믿는 문교부와 대학이 이 땅에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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