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기업의 정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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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부실기업의 정리가 본격화되면서 그 첫 작업의 윤곽이 드러났다. 예상했던 대로 이번 첫 정리는 부실의 정도가 그래도 덜한 편인 두 기업부터 선정되었다.
지난 연말 여당단독으로 처리한 조세감면규제법 개정에 따라 첫 「합리화」대상으로 선정된 두 부실기업은 각각 제3자 인수의 형태로 정리한다는 것이 정부의 발표다. 그러나 정부는 이들 기업의 부실이 어느 정도이며, 인수기업은 어떻게 선정되었고, 정리의 과정에서 어떤 지원과 혜택이 주어졌으며, 그로 인해 감면된 조세는 얼마인지 등 국민들의 중요한 관심사에 대해서는 일체 밝히지 않았다.
부실기업은 원칙대로라면 법대로 처리되어야 옳다. 따라서 불법·부당에 의한 부실은 문책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그 충격파를 염려해 정치적·행정적 처리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그 어느 때보다 객관적이고 국민이 납득할 만한 기준과 절차·뒷수습 등 만전의 준비와 사후대비가 마련되어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난 1년여의 시동경과는 그런 준비에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표된 1차 정리의 윤곽은 그런 준비와 과정을 충분히 거친 것으로 보기 어려운 여러 허점을 노출하고 있다.
그 첫째는 여전히 정리대상의 선정과 처리방향에 대한 보다 명백한 기준의 제시가 없는 점이다.
지난 2월 밝힌 합리화기준은 너무 포괄적이고 모호해서 오히려 불필요한 산업계의 불안을 야기시키고 있음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정리의 방향도 어느 정도까지는 기본원칙이 제시돼야한다. 케이스별로 원칙이 다를 경우 부실의 정리는 필연적으로 특혜의 요구를 증대시키고 정리자체를 어렵게 만들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무적으로는 개별 부실의 정도와 내용이 천차만별이고 일괄해결이 어려운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실 정리가 방대한 규모의 국가재원과 국민부담의 희생아래서 이루어지는 한 보다 객관화되고 통일된 기준의 제시가 없어서는 안될 일이다. 똑같은 이유로 부실의 실태와 정리의 과정도 국민 앞에 공개되어야 한다.
대외적인 공신력이 비공개의 명분이 되고 있으나 오히려 외국금융기관들은 우리국민들보다 더 소상히 실체를 파악하고 있음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같은 실태의 공개와 객관적인 정리과정만이 부실의 재발을 예방하고 그간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측면은 정리의 방식이다. 이번처럼 제3자 인수만이 유일한 해결책은 아닐뿐더러 오히려 부실의 확산이나 불필요한 추가 특혜의 소지마저 없지 않음을 주목한다. 부실의 정도가 극심하거나 회생의 가망 없는 기업까지도 온갖 혜택을 주어가며 제3자에게 인수시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으며 자원의 낭비일 뿐이다.
부실정리는 정리의 실적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과 과정, 그리고 그 결과에 있음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부실 정리는 신속히, 보다 객관적·공개적으로 처리돼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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