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환 관전평] 축구의 승부는 단순하면서도 냉정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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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환,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중앙포토]

기회가 왔을 때 골을 넣지 못하면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축구의 승부는 단순하면서도 냉정하다.

상대팀 온두라스 선수들의 '침대 축구'는 얄밉지만 그게 결정적인 패인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먼저 골을 넣었다면 그들이 함부로 그라운드에 드러누울 수 있었을까. 침대축구는 전력상 열세인 팀이 리드를 잡았을 때 등장하는 방법이다. 다만 상대 선수들은 보는 이들이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심하게 누워댔다. 주심이 추가 시간을 정확히 적용하지 않고 서둘러 끝내버린 것 또한 아쉽다.

결과적으로 호르헤 루이스 핀토(64·콜롬비아) 온두라스 감독의 전략에 우리가 당한 모양새가 됐다. 선 수비 후 역습, 그리고 측면 위주의 공격. 2년 전 브라질 월드컵 당시 코스타리카의 8강행을 이끈 '좀비 축구' 그대로였다. 우리가 주도권을 잡고 잘 싸웠지만 핀토 감독 특유의 카운터어택을 막지 못했다. '뒷 공간 침투는 알고도 당한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에겐 아쉬운 부분이다.

무득점에 그친 손흥민(24·토트넘)이 네티즌에게 비난 받는 게 안타깝지만, 이는 공격수가 안고 가야 하는 숙명이다. 우리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펠레도, 마라도나도, 네이마르도 골을 못 넣으면 비난을 받는다. 아르헨티나가 코파 아메리카 결승에서 칠레에 패해 준우승에 그쳤을 때 천하의 메시도 욕을 먹었다. 손흥민도 이 상황을 견뎌내야 한다. 못 이겨내면 한 단계 도약할 수 없다.

손흥민이 상대 페널티박스 바깥 지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건 장점과 단점이 있다.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한 건 팀 플레이에 도움이 됐지만, 정작 스피드를 살려 상대 위험지역을 파고들어야 할 때 힘을 쓰지 못했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는 통할 수 있는 플레이지만, 공·수 전환이 빠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는 힘겨울 수 있다.

나는 현역 시절 골을 넣지 못할 때마다 욕을 많이 먹었다. 체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많이 받았다. 허리 지역에서 열심히 드리블에 가담하다보니 체력의 완급 조절이 잘 안 됐고, 결정적일 때 힘이 빠졌다. 나이가 들어 경험이 쌓이고, 내 플레이의 장·단점을 깨달은 뒤부터는 전방 지역에 머무는 시간을 늘렸다. 미드필드 지역에서는 동료들에게 공간을 만들어주는 데에만 주력했다. 근래 들어 축구의 트렌드가 바뀌면서 공격수의 수비 기여도가 점점 높아지는 추세지만, 공격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체력은 남겨둬야 한다.

이번 올림픽의 최고 수확은 단연 공격수 황희찬(20·잘츠부르크)이다. 기존의 '한국식 공격수'와는 전혀 다른 유형이다. 때론 저돌적으로 밀어붙이고 때론 좌우로 빠져나간다. 땅을 보지 않고 고개를 들어 상황을 파악하며 경기를 풀어간다. (황)선홍이 형이나 (최)용수 형, (이)동국이처럼 전통적인 스타일의 타깃형 스트라이커와는 확실히 다르다. 새로운 유형의 골잡이가 나온 것 같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A대표팀에 언제쯤 뽑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예의주시할 만한 선수다.

권창훈(23·수원 삼성), 문창진(23·포항), 류승우(23·레버쿠젠)은 골도 넣고 잘했지만, 팀 플레이에 아쉬움을 남겼다. 미드필드 지역에서는 득점 이외에도 해줘야 하는 역할들이 있다. 2선 공격진을 구성한 이 선수들이 뭉쳐 독특한 색깔을 냈지만 연결고리 역할, 경기를 운영하는 역할을 미흡했다. 재능이 있는 선수들인 만큼, 이번 대회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성장할 거라 기대한다. 수비진 또한 마찬가지다.

리우 올림픽 멤버들은 '골짜기 세대'라는 평가를 딛고 8강에 올랐다. 팀 구성 당시엔 올림픽 본선 통과조차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론이 있었지만 똘똘 뭉쳐 극복했다. 기성용 등 2012년 런던올림픽 동메달을 이끈 1차 황금세대, 이승우 등 2020년 도쿄올림픽에 나설 2차 황금세대 사이에서 주목 받지 못했지만 한국 올림픽팀 역대 조별리그 최고 성적(2승1무)을 냈다.

어쩌면 우리 선수들이 조별리그 독일전과 멕시코전에서 너무 많은 걸 쏟아부어 힘이 떨어진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신태용 감독은 갑작스런 병마로 물러난 이광종 감독의 지휘봉을 물려 받아 짧은 시간 동안 경쟁력 있는 팀을 만들었다. 남모를 고민이 많았을 신 감독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벨루오리존치에서.

정리=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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