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총리실은 섭정 두려했으나 일왕은 퇴위 굽히지 않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일본 정부가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생전 퇴위 대신 섭정(攝政)을 두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왕실 측이 반대를 굽히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일본 왕실제도의 기본법인 왕실전범 16조는 일왕이 중병 또는 중대 사고로 국사 행위를 할 수 없을 때 왕실회의의 논의로 섭정을 둘 수 있도록 돼 있다.

10일 요미우리 신문에 따르면 일본 총리실은 일왕의 영상 메시지 발표 하루 전인 7일 왕실을 관장하는 궁내청으로부터 메시지 최종본을 받았다. 하지만 최종본에는 지난 6일 받은 문안에 없었던 한 구절이 가필됐다. 메시지의 핵심인 “점차 진행되는 신체의 쇠약을 고려할 때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몸과 마음을 다해 (국가) 상징으로서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앞 부분에 “다행히 건강하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이라는 표현이 새로 들어갔다. 관저 관계자는 이 구절을 보고 섭정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일왕의 강한 의지를 느꼈다고 한다.

총리실은 당초 일왕의 생전 퇴위가 아닌 섭정을 선택지로 상정해왔다. 왕실전범을 개정해 생전 퇴위를 제도화하면 일왕의 자유 의사에 바탕을 두지 않는 강제 퇴위의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물밑에서 궁내청에 섭정을 두는 방안을 타진했다. 총리실 측은 수 차례에 걸쳐 “섭정은 안 되겠냐”고 확인했지만 궁내청은 “안 된다”고 완고한 입장을 보였다. 국민과의 접촉을 쌓아가는 것이 책무라고 보는 일왕의 생각이 섭정과 맞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아키히토 일왕 스스로도 지난 8일 메시지에서 섭정을 두는 것에 대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을 드러냈다. 섭정을 두더라도 “책무를 다하지 못한 채 생애의 끝에 이르기까지 계속 천황이라는 데는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왕은 헌법상 국정에 관한 권능을 갖지 않는다고 규정돼 있는 만큼 생전 퇴위를 위한 법 제도 개정을 촉구할 수가 없다. 일왕과 가까운 관계자는 총리실과의 줄다리기 끝에 발표된 일왕 메시지는 “스스로의 딜레마를 타파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고 해석했다고 요미우리는 전했다.

도쿄=오영환 특파원 hwasa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