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피치] ML신인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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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파 신인들이 '약속이나 한 듯' 부진하다.

신인왕은 떼어놓은 당상처럼 보였던 최희섭(시카고 컵스)은 네경기 16타석 연속 무안타로 허덕이고 있다. 21일(한국시간)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경기에서는 출전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타율은 0.233으로 떨어졌다.

스프링캠프 때 "빅리그 엔트리만 들어도 다행"이라고 했던 서재응(뉴욕 메츠)은 당당히 선발자리를 꿰차고 성공시대를 예고했다. 서재응 또한 신인왕 후보로 거론됐지만 7월 이후 성적은 내리막길이다.

지난 6월 1일부터 거침없이 4연승 행진을 이어갔던 서재응은 6월 28일부터 다섯경기에서는 4패만을 기록하며 부진의 미끄럼틀을 타고 있다. 그 기간의 방어율은 무려 8.03이다. 4연승을 기록했던 여섯경기에서 방어율 1.44였던 '그 서재응'이라고 보기 힘든 부진이다.

봉중근(애틀랜타 브레이브스)도 비슷한 상황이다. 봉중근은 21일 뉴욕 메츠전에서 1과3분의1이닝 동안 4안타.3실점했다. 세명 다 전반기에 비해 저조한 페이스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들 신인 세명의 성적은 과연 나쁜 걸까. 아니면 신인치고는 정말 잘 하고 있는데 우리의 기대치가 너무 큰 걸까.

자신있게 후자라고 말하고 싶다. 최희섭.서재응.봉중근은 당당히 신인왕 후보로 거론까지 됐다.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성공적인 '1년차'시즌을 보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지금 겪는 부진은 신인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통과의례'가 아닐까.

국내파 빅리거 가운데 가장 성공한 박찬호(텍사스 레인저스)는 1994년 5월까지 '마이너리그에서' 단 1승도 못 올렸다. 팀 안에서는 어쨌든 스스로 '나는 이 친구들하고 다른 메이저리그 출신'이라고 생각했던 박찬호에게 더블A에서 1승도 못 올리는 부진은 큰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무척 초조해 했다.

그때 박찬호가 속해 있던 샌안토니오 미션스의 투수코치 버트 후튼(현 휴스턴 애스트로스 투수코치)은 이런 말을 해줬다. "찬호, 하느님이 이 세상을 만드는데도 1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어. 전지전능한 하느님에게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 계단씩 밟고 올라가는 경험과 순서가 필요한 거야. 지금 찬호의 마음속에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이루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그렇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아. 다시 한번 자신을 돌이켜보고 천천히 경험을 쌓아 빅리거로 올라갈 수 있길 바라"라고.

이 말은 지금도 박찬호가 가슴에 담아두고 있는 교훈이다. 한 계단씩, 한 걸음씩 올라가고 나아갈 때 높이,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최희섭.서재응.봉중근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지난주 만났던 레인저스의 리처드 세코 스카우트는 "마이너리거가 빅리그에서 주전으로 성장하는 확률은 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최희섭과 서재응.봉중근은 이미 그 '바늘구멍'을 통과한 '우량주'들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하느님에게도 필요했던 1주일, 바로 시간과 경험이다. 주변에서 먼저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이태일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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