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M파장교들이 「정군」주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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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마르코스」대통령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선 「엔릴레」국방상과 「라모스」군참모총장서리의 움직임은 부정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의 합법성을 부정한것이자 직업군인정신에 투철한 필리핀군부개혁운동(RAM) 파 장교들과 부정부패에 물든 「베르」파 군주뇌부의 정면대결을 의미하는 것이기도하다.
필리핀군부는 81년 계엄해제직후 군참모총장에 임명된 「베르」에 의해 「마르코스」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46년 독립 초기에만해도 완전한 문민통제 (Civilian Control) 의 원칙이 확립되어 있었던 필리핀군부는「마르코스」집권과 함께 그의 권력기반의 주측으로 기울어지기 시작, 72년 계엄령선포 이후에는 정적들에 대한 체포·구금·수색등 탄압의 도구로 바뀌어져 갔고, 「마르코스」대통령의 운전수겸 경호책임자였던 「베르」가 등장하면서부터는 정권옹호와 부정부패가 더욱 만연, 83년8월에는 야당지도자「아키노」상원의원피살사건 배후조종혐의로 「베르」가 법정에 서기도 했다.
현재 필리핀의 25만 정규군을 통솔하는 약1백명의 장성들중 4군사령관과 지역군사령관등 군요직은 거의모두「베르」파가 차지하고 있다. 군의 통수권은「마르코스」 대통령으로부터 「엔릴레」국방상을 거치지 않은채 직접 「베르」 에게 이어져왔다.
「엔릴레」는 72년∼81년 사이의 계엄령기간에는 「베르」가 하고있는 역할을 맡고있었으나 「베르」 등장이후에는「마르코스」의 자문역으로 그위치가 낮아졌다.
「베르」장군아래서는 장교들의 진급이 그들의 업적이나 능력보다는 「베르」 와 개인적으로 얼마나 가까운가에 달려있어 「마르코스」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한 장성들은 정년과 관계없이 요직을 유지하고있다.
이같은 군부의 상황에 불만을 갖고 정군운동을 일으킨것이 「라모스」군참모총장서리가 주도하는 RAM이다.
이 운동에는 71∼84년사이 필리핀 육사를 졸업한 청년장교 약1천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1만5천여명의 전체장교중 약3분의1이 이에동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정권과 관계없는 순수한 군부내의 정풍운동을 통해 군의 윤리·공정성·질서·정의·도덕회복을 주장하고있다. 이들은 이번 대통령선거직전에도 군기지에서 민간인들과 합동으로 자유·공명선거를 위한 대규모집회를 계획했었으나 실천단계에서「오초코」해군제독등 군수뇌부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되고 말았다.
필리핀정치에서 유일하고도 가장 긍정적인 발전이라고 평가되고있는 군개혁운동이 본격화된것은 83년 「아키노」피살사건에 「베르」 장군등 25명의 장교들의 관련설이 나돌면서부터.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은 「엔릴레」국방상과 「라모스」 중장등 2명의 군지도자로부터 인정을 받았을뿐 나머지 군 수뇌부는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해왔다.
「엔릴레」 와 「라모스」는 이들이 군부 또는 집권층과의 직접적인 마찰을 피해가면서 정치적중립과 온건한 기풍을 되찾겠다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지난해4월 「마르코스」대통령과 군부개혁운동파장교 30명의 대화를 주선하기도했다. 당시 「마르코스」대통령은 이 개혁주의 움직임을 표면적으로는 관용하겠다는 태도를 보였으나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키노」사건재판직후「베르」 장군을 복직시켰으며 정년을 넘긴 29명의 장성들도 모두 현직을 고수하고있다. 단지 「베르」 가 군참모총장자리를 비운 14개월동안(84년10월∼85년l2월) 권한대행을 한 「라모스」 중장에 의해 개혁운동의 일환으로▲비위정부군에 대한 처벌강화▲군재훈련센터건립▲정부군 부정부패조사특별위원회구성등 기강확립을 위한 방안들이 실천됐을 뿐이다.
이같은 조치에따라 83년 월평균 2백98건에 달했던 정부군관련 각종 비위사건은 95년 1백31건으로 절반이하로 줄었다.
그는 84년10월 군참모총장서리에 취임하면서 『정부군이 국민의 보호자가 아니라 국민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국민의 적으로 오해받고 있다. 군부가 정치도구로 사용되어 왔다는 평판과 함께 이같은 나쁜 이미지를 씻는것이 나의첫 과제』 라고 말한바있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개혁노력도 군부의 하부조직에만 영향을 주었을뿐 「베르」파가 장악하고있는 수뇌부에는 전혀 손을 대지못했다. 「베르」의 복직을 구상해온「마르코스」 대통령이 그에게 작전권만을 허락했을뿐 인사권은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2·7선거직후 미국의 압력과 대민무마정책의 하나로「베르」장군을 전격해임, 「라모스」 중장을 다시 군참모총장서리로 임명했으나 군수뇌부는 여전히 「마르코스」 자신과 「베르」 가 조종하고 있었다.
군참모차장· 경찰군사령관·국가안정위원회 의장등의 요직을 갖고 휘하에 12만병력을 거느려온 「라모스」 중장은 이같은 「마르코스」 의 태도에 정면으로 도전, 개혁운동에 앞장선 소장파장교들의 지원과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 그리고 부정선거에 환멸을 느낀 「엔릴레」국방상등의 동조를 얻어 군부개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정치개혁을 부르짖고 나선 것이다.
여기에 야당 대통령후보였던 「코라손· 아키노」 여사 또한 군부의 부정부패척결과 정치적중립을 적극 옹호하고나서 「마르코스」 대통령의 기반을 뒤흔들어 놓았다.
「마르코스」 는 이제 그가 가장 믿었던 군부에의해 권력의 핵심으로부터 밀려나기 시작한것이다. <홍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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