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6)제84화 올림픽반세기<45>|김성집|불운 겹친 복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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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역대 올림픽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던 복싱은 동경대회에선 경사와 불상사가 겹친 종목이었다.
경사는 정신조(밴텀급)의 은메달이고, 불상사는 조동기(플라이급)의 실격패에 항의한 링 점거사건이다.
중·경량급에 8명을 출전시킨 한국 복싱은 경량급에 큰 기대를 걸었고 주동기와·정신조는 손꼽히던 메달 유망주였다.
1, 2회전에서 쾌조의 컨디션으로 판정승, 메달권을 눈앞에 둔 조동기는 준준결승에서 소련의 「소로킨」과 맞불었다.
첫 라운드의 공이 울리자 「소로킨」은 맹렬한 기세로 밀고 들어왔고, 조동기는 「소로킨」의 스트레이트 공격을 피해 더킹했는데, 단신인 조가 더킹하면 자연히 상대방의 벨트 라인 아래로 고개가 숙여지게 됐던 것이다.
그러자 「태너」 심판(호주)은 조에게 1차 주의를 준 뒤 47초만에 다시 경기를 중단시키고 조에게 반칙을 선언했다.
다시 경기가 속개돼 접근 난타전이 전개되는 순간 「태너」심판은 경기중단 명령을 내렸는데 조가 세 차례의 중단명령에도 응하지 않자 주의 실격패를 선언해 버렸다.
어처구니없는 판정에 당황한 한국응원단과 조는 항의를 제기하며 링을 점거, 경기가 40분 동안 중단되는 사태를 빚었다.
다음날 열린 국제복싱연맹 집행위원회는 링 점거사건의 책임을 물어 우리 선수와 임원에게 3년간 자격정지 처분을 내렸고, 「태너」심판은 올림픽 기간 중 임무를 정지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연맹집행위원회는 우리 선수단의 증언 청취를 거부하는 등 오만한 자세를 취해 큰 비난을 샀다. 이런 가운데 정신조는 승승장구, 일약 결승에 올라 우리 선수단은 물론 전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결승전 상대는 일본의 「사꾸라이·다까오」. 「사꾸라이」는 1년 전 한국 원정경기에서 두 차례나 우리선수에게 패했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정에게 첫 금메달을 기대하는 것도 큰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결전장에 나선 정신조는 정상의 컨디션이 아니었다. 1라운드 초반 주도권을 잡으려고 공격해 들어가던 정은 「사꾸라이」의 라이트 스웡 카운터를 맞고 가볍게 다운됐다. 이 순간「사꾸라이」는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반 그로기상태의 로프 다운을 빼앗았다.
2라운드에 들어와서도 「사꾸라이」는 연타 공격을 퍼부어 결국 1분10초만에 RSC로 경기를 끝냈다.
정이 허무하게 무너지자 응원단의 실망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에서도 큰 소동이 벌어졌다. 일부 신문사에서는 정의 승리를 확신하고 마감시간에 쫓겨 「정신조 첫 금메달」이란 타이틀로 신문을 인쇄하던 중이였는데 이게 모두 휴지로 돌아갔던 것이다.
정신조는 왜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는가. 정은 1회전 아랍공화국 「파락」 선수와의 대전에서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골절상을 입었다. 기프스를 하고 치료해야할 상처였지만 정은 재일동포 한의사에게 침을 맞으며 응급치료만을 받고 준결승까지 강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결승전날엔 한의사가 오지 않는 바람에 정은 경기 시작 1시간반 전에 국부 마취주사를 맞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정은 정신이 몽롱해지고 힘이 빠진 상태로 링에 올랐다.
또 다른 일화로 결승전 전날 밤 정이 인터뷰를 요청하는 방송기자와 함께 선수촌을 나가 행방이 묘연해지는 바람에 큰 소동이 벌어진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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