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여건의 개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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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신임 정인용 재무부장관이 첫 은행장 회의에서 밝힌 금융 정책의 줄거리는 대체적으로 현실 경제와 통화 정책간의 거리를 좁혀 실물 쪽의 활성화를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받아들여진다.
비록 「물가를 자극」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통화를 신축적으로 공급하겠다는 것은 현재의 경기 부진을 고려할 때 일단 기대해 볼 만한 방향이다.
금융정책에 관한 한 언제나 실물 경제의 흐름과 유리되어서는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실물과 유리된 금융정책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오히려 실물의 흐름에 장애가 되는 것이 지난날의 경험이다. 그래서 언제나 금융정책은 시의를 얻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신축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물론 통화정책이 너무 신축 자재해서 원칙을 벗어날 경우 그 해독은 더욱 커지지만 적절한 가이드 포스트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신축성은 언제나 필요하다. 지금의 실물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신축성을 필요로 하는 시점이다.
금융의 신축성을 얘기할 때 흔히 공급량의 측면이 부각되지만 질의 문제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 단적인 예가 지난해의 금융 경험이다. 지난 한햇동안 통화 공급량은 총 통화 기준으로 15%가까이 늘어났고 총 유동성 기준으로는 21%가 넘는 대폭적인 증가를 기록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많은 통화 증가가 주로 민간 부문을 통해 일어남으로써 민간 여신 증가액은 그 전해에 비해 무려 50%이상 많았다.
이처럼 유례 드문 유동성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생산적인 민간 투자 증가는 극히 미미했던 점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물론 민간 투자는 더 많은 다른 경제적 또는 비경제적 변수들에 영향받았지만 엄청난 유동성 증가가 투자로 이어지지 않은 배경에는 금융 공급의 경로와 금융 조건도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판단된다.
대량의 금융 공급이 주로 생산 투자 지원보다는 부실 산업과 기업의 구제금융으로 나간 점이 무엇보다 큰 원인이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금융의 조건이 투자 활성화에 기여하지 못한 측면도 부인할 수 없다. 80년대 초반 이후 민간 투자의 현실 수익률이 추세적으로 떨어지는 과정에 있고 신 투자의 기대 수익률도 점차 하강 국면에 접어든 반면 민간 금융의 금리 체계는 상대적으로 경직되어 왔다.
많은 기업가들이 현재의 투자비용을 감수하고 생산 기업에 투자하기보다는 금융 자산 운영에 만족하거나 비생산적 서비스산업이나 빌딩 투자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이 같은 기대 수익률 전망과 금융 조건이 안 맞는 데도 원인이 있다. 이런 현상이 오래가면 경기 진작을 위한 민간 투자의 활성화는 기대보다 못 미칠 수 있고 비생산 투자의 억제도 어려워질 수 있다.
이 경우 금융과 보물의 괴리는 더욱 커지고 결과적으로는 실물에 대한 교란 요인화 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따라서 증가된 금융 공급이 생산 투자와 수출 진흥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구제적 부실 금융의 누출을 차단하고 금리 인하를 주축으로 한 과감한 금융 조건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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