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김정은에게 ‘인권 범죄자’ 낙인…미국 대북 제재의 완결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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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몸통으로 지목한 미국의 대북 인권제재안은 북한에 대한 강경 제재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올 1월 북한의 핵 실험 강행 이후 미국은 북한 광물 자원 수출 제재(2월), 자금줄을 틀어막는 ‘자금 세탁 우려 대상국’ 지정(6월) 등 북한 정권 압박 카드를 연이어 내놓았다. 하지만 정권에 타격을 주기 위한 실무적·우회적 제재에 가까웠다. 반면 이번 인권제재안은 김 위원장을 국제사회의 ‘인권 범죄자’로 낙인 찍는 직접적 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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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입출국 금지 등 실효성 적지만
김정은에게 견디기 힘든 모욕 될듯
북 인권 전혀 개선 안되자 초강수
“돌아올 수 없는 다리 건너” 분석도
대화 봉쇄로 북한 추가 도발 우려

제재 내용은 미국 내 자금 동결, 미국 입출국 금지가 주요 내용이어서 해외 교류가 없는 북한 지도부에 대한 제재로는 현실적 효과가 크지 않다. 하지만 미국이 북한 인권 유린의 총책임자로 김 위원장을 직접 지목하며 제재 대상자로 올리는 것 자체가 인권 문제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왔던 김 위원장으로선 그 어떤 제재보다 견디기 힘든 모욕이 될 수 있다.

톰 말리노스키 미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는 지난달 10일 대북 인권 제재를 설명하면서 “숙청, 탈북자 추적, 강제수용소 운영에 관여한 자(김정은)에게 ‘네가 누군지, 이름이 무언지 안다. 너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란 메시지를 줌으로써 태도 변화를 유도하려 하는 게 목적”이라고 말했다.

미 정부의 초강수는 북한의 인권 실태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미 국무부는 지난달 30일 발표한 연례 인권보고서에서 “북한에서는 8만~12만 명의 정치범이 수용소에 갇혀 있다. (수용소 내) 강제 노동은 체계화된 정치적 억압 체계”라고 규정했다.

유엔 인권이사회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도 “북한에서 이념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사법절차 없이 정치범수용소로 사라져버린다. 연좌제에 따라 정치범 가족까지도 수용소로 보내지며, 이 과정에서 고의적인 굶주림이나 처형·고문·성폭행·낙태 등의 범죄가 자행된다”고 밝혔다. “미 행정부가 북한의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해 지나치게 손을 놓고 있다”는 미 의회의 압력도 초강경 조치의 배경이 됐다.

그러나 이런 배경에도 이번 결정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조치가 될 수 있다”(소식통)는 전망이 나왔다. 이번 제재의 근거가 된 ‘대북 제재 강화법’(H.R. 757)에는 미 국무부가 ‘북한 인권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해야 할 시한만 명시돼 있을 뿐 미 정부가 보고서에 적시한 리스트 대상자에 대해 언제까지 ‘실제적 제재’를 발표해야 하는지 언급이 없었다. 다음 정권까지 제재안 발표 없이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또 “김정은의 이름 석자를 넣고 안 넣고는 하늘과 땅 차이인데 만약 넣을 경우 사실상 향후 미·북 관계는 당분간 복원되기 힘들 것”이란 주장도 상당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진통 끝에 미 정부가 굳이 보고서 제출과 동시에 제재 발표라는 초강수를 두고, 여기에 김정은의 이름을 넣기로 한 것은 국제사회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핵 실험, 미사일 발사 등의 도발을 거듭하는 북한 정권과는 협상의 여지가 없는 만큼 강경 압박이란 기존 정책 기조를 관철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이번 결정으로 북한 문제를 풀기 위한 대화 시도는 사실상 봉쇄되고 북한의 반발이 거세질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북한의 ‘지존’을 직접 겨냥한 미국에 대해 북한이 어떤 형태로든 도발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추가적인 핵 실험이나 괌 등을 상정한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나설 수 있다. 이 경우 북한을 둘러싼 북·미, 남·북 긴장이 고조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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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 정부가 북한 인권에 대해 3개월에 한번씩 업데이트된 내용을 보고하고, 이에 맞춰 미 정부의 조치도 바꿀 수 있는 만큼 차기 정권에서 이를 북한과의 협상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 정부는 이번 북한 인권 보고서 제출과 제재안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2010년 9월 이란 제재 결정 당시 멜라트은행을 포함시켰다 제소당해 패소한 경험을 거울 삼아 법적 증거 확인 작업을 거듭한 것으로 전해졌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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