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행복, 소녀는 엄마를 보며 일어섰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소녀는 넘어지는 것부터 배웠다.

악바리 태권선수 김소희의 다짐
초등학교 시절 큰 불 나 빚더미
식당일 하는 엄마보며 독기 품어
손가락 부러져도 세계선수권 금

“충북 제천에서 부모님이 큰 갈빗집을 운영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식당에 불이 났어요. 엄마 머리카락에 불이 붙고, 손님들이 대피할 만큼 큰 화재였죠. 우리집은 졸지에 빚더미에 앉게 됐죠”. 리우 올림픽 여자 태권도 49㎏급에 출전하는 김소희(한국가스공사)는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가족의 행복이 불타버렸고, 잿더미 위엔 빚만 쌓여갔다. 소녀의 엄마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얘기를 하는 걸 꺼린다.

엄마는 딸에게 일어나는 법을 가르쳤다.

기사 이미지

국가대표 김소희는 합숙훈련을 하느라 엄마와 거의 떨어져 지낸다. 연락을 자주 하지 못하지만 엄마를 잊은적은 한 순간도 없다. 리우 올림픽 출전을 앞두고 어머니 박현숙씨를 꼭 끌어안은 김소희(왼쪽). [사진 P&G]

박현숙(51)씨는 딸을 위해 더 강해져야 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며 빚을 갚았고, 지금은 제천에서 조그만 식당을 하고 있다.

김소희는 “힘들게 일하면서 제 뒷바라지를 해주시는 엄마를 위해 꼭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어머니 박씨는 “소희는 코피를 자주 쏟았다. 수건이 젖을 정도로 코피를 흘려 새벽에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남편이 소희에게 태권도를 시켜보자고 했다”고 전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태권도를 시작한 김소희는 하루에 도장을 서너 번씩 갈 만큼 열성적이었다. 박씨는 “딸이 너무 운동만 하는 것 같아 치마를 입혀보고 피아노도 가르쳐 봤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서울체고 진학을 앞두고 소희가 두 달간 개인 훈련을 한 적이 있었어요. 한겨울이었는데 매일 새벽 나는 자전거를 탔고, 소희가 뒤를 따라 뛰었지요. 열심히 하는 딸을 위해서 나도 강한 엄마가 되어야 했어요.”

중3 때 1m53㎝에 불과했던 김소희의 키는 고교 때 10㎝ 이상 자랐다. 워낙 독하게 훈련한 덕분에 체력도 강해졌다. 박씨는 “소희가 박지성(35)처럼 활동량이 좋아 ‘산소통’이란 별명을 얻었다. 고교 마라톤 대회에 나가 3위에 오르기도 했다”며 웃었다. 2011년 태권도 세계선수권대회 16강전에서 김소희는 상대 선수의 공격을 막다가 큰 부상을 당했다. 피가 철철 흐르면서 손가락 뼈가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박씨는 “도핑테스트에 걸릴까봐 진통제도 먹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발가락도 성치 않았는데 모두가 말려도 소희는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그 몸으로 금메달을 땄다”고 회상했다.

| 기업 후원으로 모녀 함께 리우행
“국가대표 돼 해외여행 보내줄게”
식당 벽에 쓴 낙서 약속 지켜

기사 이미지

김소희는 2013년 세계선수권에서도 우승한데 이어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따냈다. 세계 최고 선수로 성장했지만 올림픽은 전혀 다른 도전이다. 최강자들이 겨루는 데다 올림픽에는 46㎏급이 없어 49㎏급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1년 동안 10개국 국제대회에서 두 체급을 오갔던 김소희는 체중조절에 애를 먹었다. 그는 “며칠 사이에 한꺼번에 4~5㎏를 빼야 할 때가 많았다. 일주일 내내 하루에 바나나 1개, 요구르트 1개만 먹고 지낸 적도 있었다”며 “대회에 나가기 싫어 여권을 한강에 던져 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날 밤 11시에 태릉선수촌 트랙을 달렸다”고 말했다.

김소희는 지난해 12월 멕시코 그랑프리 파이널 1회전에서 탈락했다. 세계태권도 규정상 멕시코 선수 이트젤이 대회 3위에 오르면 김소희가 올림픽에 나가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트젤은 4위에 그쳤다. 김소희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자 엄마 얼굴이 떠올라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말했다.

박씨는 “소희가 고1 때 식당 벽에 ‘국가대표가 돼 부모님 해외여행을 시켜드리겠다’고 낙서를 한 적이 있다. 그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이번 올림픽에 한 기업의 후원을 받아 나도 리우에 가게 됐다. 효녀 덕분에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가게 됐다”며 웃었다.

태권도 종주국 한국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를 땄지만 2012년 런던올림픽에선 금메달 1개에 그쳤다. 리우 대회에서는 금메달 2개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김소희도 금메달 후보 중 하나다. 부산 동아대에서 대표팀 훈련을 돕고 있는 정광채 여자대표팀 코치는 “올림픽 49㎏급 3연패를 노리는 우징위(중국)가 강력한 라이벌이다. 김소희가 우징위와 두 번 대결해 모두 졌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김소희는 최근 하체 근력을 28%나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국가대표가 되고 나선 딸과 엄마는 대부분 떨어져 지낸다. 모녀는 평소 쑥스러워서 하지 못했던 말을 기자를 통해 주고 받았다.

“소희야, 성적은 중요하지 않아. 다치지만 않으면 돼. 올림픽 끝나면 네가 좋아하는 고사리 볶음을 실컷 해줄게.”

“엄마. 만약 내가 넉넉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지금과 같은 간절함이 없었을 거야. 강한 엄마를 보며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었어요. 엄마에게 자랑스런 딸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부산=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