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수로 빠져 숨진 농민… 관리하는 농어촌공사도 책임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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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을 가꾸던 할머니가 식물에 물을 주기위해 농수로에 갔다가 물에 빠져 숨졌습니다. 이런 경우 농수로를 관리하는 곳은 법적으로 할머니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까요?

올해로 87세가 된 이모씨는 경기도 파주의 한 아파트에 살며 근처의 텃밭에서 상추와 콩 등의 작물을 재배하는 소일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5월 15일 평소처럼 텃밭에 간다며 호미를 들고 외출한 이씨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할머니를 찾기 위해 경찰에 가출 신고를 하고 기다렸습니다.

할머니는 다음날 오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텃밭 주변을 수색하던 경찰들이 상의가 탈의 된 채 농수로 철망에 걸려있는 이씨의 시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여러 정보들을 수집ㆍ분석한 결과 ‘이씨가 텃밭에 물을 주기 위해 근처에 있는 농수로에 내려가 물을 뜨다가 빠른 유속에 휩쓸려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당시 사고가 발생한 농수로는 한국 농어촌공사가 점유ㆍ관리하고 있었습니다. 농어촌공사는 이 농수로 전체 길이 1만103m 중 약 5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2230m 구간에만 출입 차단 펜스를 설치해 뒀습니다. 대부분 학교, 어린이집, 유치원 주변 등 아이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장소였죠.

이씨가 숨진 아파트 근처에는 따로 펜스가 설치돼있지 않았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이씨의 사고 발생 3주 전에도 40대 남성이 물에 빠져 익사했던 사실이 파악됐습니다. 농어촌공사는 그제야 비로소 농사로 부근에 펜스를 설치했습니다.

농어촌공사의 뒤늦은 대처를 본 이씨의 남편과 자식들은 농어촌공사를 상대로 “추락사고 발생 위험이 큰 지역에 아무런 접근금지 조치를 마련하지 않아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며 관리자의 과실에 따른 손해를 배상하라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9단독 오상용 부장판사는 유족들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원고 승소판결 했다고 4일 밝혔습니다.

오 부장판사는 먼저 “농수로 부근에는 많은 주민이 거주하고 있고 대로변에 근접해 있어 위험이 큰 곳”이라며 “농어촌공사 담당자는 이를 알면서도 관리자로서 위험표시판이나 차단막을 세우는 등의 조치 없이 방치한 과실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이씨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추락한 잘못이 있기 때문에 손해 배상금액을 산정함에 있어서 농어촌공사의 책임비율은 40%로 제한했습니다.

이 사건의 경우에는 관리자의 과실도 있지만 개인의 부주의가 더 크다고 판단해 이씨의 책임비율을 60%로 본 것이죠. 법원 관계자는 “일반 도로에서 통행중 온전히 구조물의 부실로 사고가 발생하는 등 경우에 따라서는 관리자의 과실 책임이 개인의 부주의에 대한 책임보다 더 큰 경우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판결에 따라 농어촌공사는 이씨의 남편에게 약 1600만원, 이씨의 자녀 5명에게 1인당 각 600만원씩 총 4600만여 원을 지급하게 됐습니다. 그외 나머지 손자녀들 10명의 위자료는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정혁준 기자 jeong.hyuk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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