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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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본지 10월 31일자 7면 참조>
작년 9월 일본 천황도 『6, 7세기 국가 형성 시대에 다수의 귀국인이 도래하여 학문·문화·기술 등을 가르쳤다』고 말했듯이 고대 한국이 일본 문화 형성에 미친 영향이 지대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나 그 구체적인 사례들이 속속 발굴됨으로써 이 같은 사실을 더욱 굳혀 주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 학계는 한국 문화가 일본에 끼친 절대적인 공헌을 될수록 은폐하거나 왜곡하려고 애써왔던 것도 사실이다.
한국이 일본에 끼친 최초의 공헌은 일본의 건국이었다. 김정학 교수(정문연)는 『한반도 남부의 가야 지방으로부터 일본열도로 집단 이주, 농경 문화 등 새로운 문화를 전한 것은 기원전 4세기경의 야요이(미생) 시대부터』라고 말했다.
그 뒤 단속적인 한반도로부터의 민족이동은 일본 건국의 토대를 이뤘다.
특히 백제의 영향이 지대했는데 백제가 일본과 처음으로 국교를 맺은 것은 4세기 후엽 백제 근초고왕 때의 일. 아직기에 이어 유명한 왕인 박사가 일본에 건너가 한자와 한학을 가르친 것은 기원 405년.
불교 및 불교문화의·전래는 최대의 문화적 공헌이었다. 538년 백제의 성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불상과 경론을 전했고 이어 유명한 승려와 불상 만드는 조불사, 절 짓는 조사공, 와공들이 잇달아 일본에 건너갔다. 백제의 조불사들은 그 땅에 거대하고 눈부신 금동불상을 만들어 안치했다.
유교의 전파도 이에 못지 않았다.
왕인 박사외에 백제 무령왕 13년(513년)엔 오경박사 은양이를 보내 유교를 가르쳤고 그 뒤 대개 3년마다 교대로 오경 박사를 파견했다.
이밖에도 계속해서 의박사·력박사·역박사·화사·채약사·악인·조원사·직물공· 재봉공 등 학자·기술자들이 떼지어 건너가 윤택하게 사는 방법들을 가르쳤다.
특히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멸망한 후 왕족을 비롯한 많은 교양 있는 상층 계급의 일본 망명은 일본 문화에 충격적인 영향을 줬다. 그러나 그들의 자취는 극히 일부만이 일본 문헌에 기록돼 있을 뿐이다. 7, 8세기 중국의 수·당에 유학한 학생이나 승려는 거의가 한국계 후예들이었으며 문서나 기록을 맡은 벼슬인 「후히또」(사·사인)는 대개 백제계 사람들이 대대로 세습했다.
고대 일본의 최대 가사 집인『만엽집』의 3대 작가중의 한사람인 산상억량이 백제인임은 일본 학자들도 주장하고 있다. 일본 쓰꾸바(축피)대 중서진 교수는 산상억량이 백제 멸망 후 일본에 망명한 귀족 억례복류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김사엽 교수(동국대)는 『만엽의 표기법이 우리 향가의 표기법과 거의 일치했다』고 말했다.
신라쪽의 영향력도 만만치 않았다. 신형식 교수(이화여대)는 『백제의 영향력이 너무 세다보니 여기서 벗어나고자 신라와의 교류에 힘썼던 것』이라고 말했다.
6, 7세기 일본 개혁 정치의 주역인 성덕태자의 막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진하승은 신라계 이주민이었으며 645년 율령 국가 수립을 위한 정치적 결단이었던 대화개신의 주요 브레인인 고향현리 등은 모두 신라 유학생 출신이었다.
천무천황은 676년 유신라사를 파견, 원효의 불교 철학과 국가관을 흡수케 하고 설총·강수의 수준 높은 유학을 받아들여 새로운 지배계급의 정신적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703년엔 2백 4명의 대규모 사절단이 신라에 들어왔으며 707년에는 5차에 걸쳐 유학생이 집중적으로 파견됐다. 이는 당시 정치·문화의 절정기에 있었던 신라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욕심에서였다.
김정학 교수는 『오늘날 일본의 상층 계급중에는 한국계 후예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듯 고대 한국이 일본 문화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음에도 일본의 정사라는 『고사기』 『일본서기』에선 이 사실을 맹랑하게 왜곡하고 있다. 당시 역사 기술 분야까지 한국계 도래인들이 관장했음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무슨까닭일까.
김 교수는 『사서 펀찬 당시 이들은 이미 일본인화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도래」시기와 그 후 「펀찬」 시기와는 약 1세 기간의 시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김사엽 교수는 『일본 문화의 뿌리가 한국임에도 왜 그들은 선진국이 됐고 우리는 뒤쳐져 있는가를 생각할 때』라면서 일본을 아는데 좀더 힘써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근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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