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서사시 『홍범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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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근래에 발표한 연작시들에서 농가의 한 귀퉁이에 죽은 듯이 놓여 있는 농기구들에 따뜻한 눈길을 보내면서 그것들의 다양한 가능들을 매개로 하여 농민의 삶과 생활감정을 밀도 있게 그려낸바 있는 이동순은 이제 한 독립운동가의 위대한 생애와 나라살림 전체로 그의 관심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이 시인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홍범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해방되기 2년전까지 75년간의 생애를 통해 의병을 일으켜 갑산·삼수 등지에서 일본 수비병을 격파하기도 하고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대한독립군 총사령이 되어 봉오동 등지의 전투에서 일본군 수백명을 사살하기도 한 무장독립운동의 중심인물 이었다. 그의 이러한 행적은 자연과 초자연, 역사속의 인간과 영웅의 삶을 빈틈없는 한 덩어리로 묶어 세계의 통일적 비전을 보여주는 서사시의 소재가 되기에 알맞은 것이다.
최근에 부정기간행물로 복간된『창작과 비평』에 실린 홍범도는 그 첫 부분인 1천6백41행이 먼저 발표되고 있다.
영웅적 소재의 서사시들은 대개 영웅의 탄생에 얽힌 초자연적인 힘의 감응과 같은 다소 신비스러운 현상의 묘사로 시작되지만 이시는 삶의 터전을 잃고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떠나는 사람들과 바다건너 일본으로 들어가 탄광과 공장지대에서 온갖 비인간적인 고통을 겪어야 하는 뿌리 뽑힌 백성들의 묘사에서 시작된다.
일본속의 한국인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과 일본인의 멸시를 견디다 못해『불쾌불결한 과격노동/진폐 규폐 부화 울분에/다 썩어 실오락 숨만 붙은 이내 몸이지만/더러운 왜 놈땅에 묻히긴 싫어/보구 싶어요/나 돌아갈래요 어머니/죽은 혼백이 되어서라도 꼭 돌아갈래요』라고 처절한 절규를 토해내기도 하고 『감시탐조등 전기철조망 건너뛰어/저 지긋지긋한 이시까리탄전 매몰차게 뒤로하고』비장한 탈출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간도로 떠나간 사람들의 처지가 더 나은 것도 아니다.
이들 역시 온갖 세력들에 떠밀리며 좀처럼 삶의 터전을 일구지 못한다. 『날이면 날마다/전쟁터 같은 그곳 생활/적색당원 다녀가면/관헌 몰려오고/관헌 지나가면/마적 토비떼 떠나가면/문전걸식 유랑꾼이 휘파람부네.』
이 시인이 홍범도의 영웅적 생애를 묘사하기 전에 이처럼 질긴 목숨을 부여안고 몸부림친 당시 사람들의 참담한 삶을 드러내는데 힘쓰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몇몇 서사시들이 주인공의 삶을 단선적으로 따라가면서 그들의 영웅적 면모를 드러내는데 치중함으로써 빚어진, 시대상황이 사상된 공허한 인간상 대신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위대한 인물의 도래에 적합한 시대적 분위기를 묘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홍범도의 탄생으로부터 그가 성장하여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나가 백두산의 천지에 이르는 과정을 담고 있는 이번 연재분에서는 웅대한 자연과 인간의 교감, 아버지의 뜻 깊은 가르침 등을 통해 하나의 위대한 정신이 잉태되어가는 모습이 풍부한 우리말 구사와 다양한 시적 변주를 통해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홍범도 부자가 천지에 이르러『태극고요 앞에서/무릎 꿇고 조심조심 경배』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인간정신이 한데 어우러져 빚어내는 고조된 정서, 다시 말해 서정시에서나 만나게 되는 정서적 고양까지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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