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센서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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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센서스는 원래 라틴어로「등록한다」 는 뜻이다. 고대 로마는 5년마다 시민들에게 이들의 재정정도를 등록하게 했다.
그러나 센서스의 역사는 아득히 기원전 3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빌로니아는 이 무렵 벌써 국가재정읕 짜기 위해 시민들의 부동산과 농사 규모를 조사했다. 이집트나 중국에서도 기원전 34년 무렵에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때의 센서스는 정확도에 문제가 있었다. 과세나 부역, 또는 병역을 목적으로 한 조사이기 때문에 연령이나 대상이 한정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호구조사도 기원전 기녹이 있다. 한사군시대인 기원전 1백년무렵 락낭군에는 6만2천8백12호에 40만6전7백48명이 살았다는 기록이『한서지리지』에 나온다. 한 호구당 인구가 6. 5명.
호구조사가 제도화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의 일이다. 촌적부라는 것이 있어서, 여기에 촌명,촌역, 호삭, 구삭, 소·말의 수, 유·백 추의 수목수, 호구와 우마의 증감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같은 사실은 일본의 동대사정창원에서 1933년에 발견된 우리나라 청주부근 4개 촌낙의 촌적에서 밝혀지고 있다. 통일신라때인 경덕왕 14년, 서기755년의 기록이었다.
우리나라 인구가 5백만명을 넘기 시작한 연도는 현종 10년인 1669년, 1천만명이 넘은 것은 l906년. 바로 그해 일본 관혜에 의한 무고문부 호구조사로 밝혀진 것이다. 이것은 구한말때 우리의 호구조사 숫자보다 2배나 많은 것으로 보아 그 무렵의 우리나라 센서스 수준을 알수 있다.
유럽의 경우는 17세기 초 중상주의가 성하면서 인구통계를 항정의 기초자료로 삼기 시작했다. 1801년 영국을 비롯해 프랑스, 덴마크, 포르투갈이 인구센서스를 시작했다. 전국적이고 주기적인 조사의 시초였다.
미국은 그보다 10년쯤 앞선 1790년에 인구 센서스를 실시했다. 선거와 관련한 조사였기 때문에 상당히 정확했다.
조사시기는 나라마다 달라 0(영=10년)년 주기국과 5년 주기국이있다.
우리나라는 절충식으로 10년마다 센서스(전인구조사)를, 5년마다 상역센서스를 하고 있다. 조사일자는 인구이동이 적고 계절적으로 적합한 11월을 택하고 있다.
올해 11월1일은 5자년 마다 있는 상역센서스의 날이다.
인구 센서스는 나라살림을 꾸려가는 가장 중요한 기본자료다. 중공만해도 그동안「짐작센서스」만 있었는데, 등소평 보용노선 이후 비로소 제대로 된 센서스를 하기 시작했다. 「나라다운 나라」구실을 한다는 얘기다.
그 점에선 우리나라는 선진국 수준은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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