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농촌의 행사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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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금년 가을, 때아닌 늦장마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 하나는 추수도 해보기 전에 풍년이라고 덤벙댔던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장마로 물에 잠긴 논에서 볏단을 건져내느라고 법석을 떨었던 일이다.
아직 정확한 통계는 잡히지 않았지만 적게는 50만섬, 어쩌면 1백만섬쯤 가을장마 피해를 본 것 같다.『가을 메 (저)는 부지깽이도 덤벙댄다』는 속담대로 추수작업으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빠야 할 무렵에 우리 사회엔 웬 행사와 잔치가 그리 많았는지 모른다.
지난 추석 (9월29일) 때부터 10월 초순께까지는 이런저런 공휴일로 저마다 일손을 놓고 들떠있었고 그 뒤에도 때마침 체전이다, 뭐다 해서 「일」 에 눈 돌릴 겨를이 없었다. 매일같이 TV에 비치는 화면은 영문도 모르는 잔치판이고, 놀고 보자는 분위기였다.
뒤늦게야 물이 넘치는 논바닥을 보고 농촌일손돕기에 나선다고 법석을 떨었다.
그런 중에도 여전히 시· 군 등 일부 지방행정기관에서는 체육대회를 연다, 민속놀이판을 벌인다는 등 각종 행사를 개최하면서 어떤 경우는 농민들의 참여를 강요하기도 했다.
이미 신문에 보도된 일이지만 늦장마에 태풍까지 겹쳐 벼베기가 늦어진 것은 고사하고 볏단이 물에 잠겨 썩거나 떠내려가는 사태를 한동안보고만 있었다. 이런 판국에 농촌을 지도 감독한다는 지방행정기관이 미리 예정된 행사라 해서 억지 잔치를 강행하는가 하면 일부농촌에서는 농민들이 이를 외면하자 기관장과 직원들만 모여 행사를 치르는 곳도 있고, 관청문을 아예 닫아걸고 단풍놀이를 떠나는 일도 있었던 모양이다.
10월이 이른바 「문화의 달」 이요, 공무원들이 각 단위직장별로 체육대회를 하게돼 있는 줄은 안다. 그리고 그러한 행사의 취지를 나쁘다고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런 행사는 그 지역의 사정과 지역적 특성을 충분히 배려해야 할 일이지 획일적으로 일정기간에 억지로 해치워야할 만큼 화급한 중대사는 아니지 않는가.
추수를 마치지 못한 농가에는 할 일이 태산같고 더구나 늦장마와 태풍의 피해를 당한 농민의 상심은 모두가 노는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판국에 놀자판을 벌여놓고 농민을 동원한다면 이는 흥도 나지 않는 잔치판을 벌이겠다는 발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도시에서는 문화를 찾고 놀이마당을 벌이더라도 지금 농촌에서는 곡식 낟알 하나라도 더 거두어들이겠다고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때임을 지방행정을 책임진 사란들만이라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농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요, 예의다. 지금이라도 못다한 행사는 중단하고 농촌일손돕기에 나설 일이다.
물론 인간에게 놀이와 휴식은 생활에서의 중요한 활력소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1년 내내 농사일에만 파묻혀 사는 농민들에게는 가을에 한번 신명나게 놀이판을 벌이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요, 위안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농사의 일손이 뜸해지고 가을걷이가 다 끝난 뒤에도 늦지 않다. 앞으로는 농촌의 체육대회나 놀이행사는 지역별로 특성에 맞추어 농민들의 뜻에 따라 그 시기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놀이마당도 관이 획일적으로 주도하기보다는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그 내용과 방법을 정하여 즐기게 하고 관은 이를 옆에서 보조하는 역할에 그쳐야한다. 농촌행사가 농민을 위한 것이지 관이 행세하기 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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