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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과 유종의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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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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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렬
뉴욕특파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4월 하순 이수용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당시 북한 외무상)을 유엔본부에서 만나는 장면은 적어도 내 눈엔 의아했다. 이수용은 파리기후협정 서명식에 북한 대표로 참석 중이었다. 반 총장은 환하게 웃으며 이수용의 손을 맞잡았다.

당시는 북한이 국제사회의 고강도 제재에도 아랑곳 않고 5차 핵실험 준비에 몰두하던 시기였다. 반 총장은 이수용에게 기후변화 이슈와 유엔-북한 관계에 대해 간략하게 말했다. 하지만 북한 핵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반 총장 측은 “사무총장이 각국 대표를 맞는 짧은 순간이었다”며 ‘환영’이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과연 그렇게만 볼 사안일까. 잠깐의 만남에서라도 국제사회의 우려를 전할 수 없었을까. 상대는 북한의 외교 총책 아닌가. 때로는 뜨거운 악수로, 때로는 냉랭한 표정으로, 때로는 의도적 외면으로 상대방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지도자의 외교 아니던가. 그러나 당시 반 총장과 악수하는 이수용의 표정은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됐다는 무력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명식이라는 장소 성격이 적합하지 않았다면 따로 이수용을 만나서 핵 포기를 촉구할 수는 없었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지난해 11월 반 총장의 방북 추진 얘기가 터져 나왔을 때 미국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냥 악수 사진만 찍는 방북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식이었다. 서맨사 파워 유엔주재 미국대사는 인터뷰에서 “반 총장이 (북한의 비핵화와 인권 상황에 대해) 앞으로도 계속 강하게 대처할 것을 기대한다”고 압박했다. 그러나 당시 반 총장의 방북비전은 모호한 듯했다. 문을 닫아걸고 핵 개발에 몰두하는 북한을 어떻게 대화 테이블로 이끌어내 핵을 포기하게 만들 것인지, 지구상 최악인 북한 인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지 드러나지 않았다. 해가 바뀌자 북한은 또 핵실험을 했고 반 총장의 방북 프로젝트는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반기문 대망론을 재점화한 지난달 말 관훈클럽 간담회에서 반 총장은 남북 간 대화채널을 유지해온 이는 자신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반 총장은 이수용을 자주 만났다. 비밀 라인이 가동 중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북한이 핵을 버리게 하고 열악한 북한 인권 문제를 방치하지 않겠다는 목표와 신념이 없다면 방북은 그저 과시성 이벤트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지난 1일 뉴욕 유엔본부 브리핑에선 급기야 반 총장의 방북과 대선 출마의 관련성을 묻는 질문이 나왔다. “앞으로 남은 7개월간 무엇을 하든 대선 출마와 관련 없다고 할 수 있느냐”는 도발적인 질문도 있었다.

반 총장은 앞으로 이런 의심 가득 찬 시선을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지난 10년간 그의 열정과 헌신이 빚어낸 여러 업적도 도마에 오를지 모른다. 반 총장은 언론에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의심은 반 총장의 진정성에 물음표를 찍을 것이다. 이런 도전을 자초한 이는 반 총장 자신이다. 그것이 안타깝다.

이상렬 뉴욕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