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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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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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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①누운 자세에서 두 다리를 모아 90도 각도로 들어올린다→②다리를 곧게 뻗은 채 최대한 아래로 내려 숫자 1을 쓴다→③다리가 바닥에 닿지 않게 주의하면서 2부터 100까지 차례로 써 나간다.’ 여름을 앞두고 군살 제거를 원한다면 한번 따라들 해보시라. 힘든 게 문제지 확실한 효과를 장담한다. 나로 말하자면 이 운동법을 자그마치 30여 년 전 처음 접했다. 중2 때 첫 체육 시간. 선생님께서 흡사 약장수 같은 어조로 이리 말씀하신 거다. “너희들이 오늘부터 날마다 자기 전에 이 체조를 한다면 멋진 몸매를 갖게 될 것이고 평생 나한테 고마워할 것이다.”

세월이 갈수록 빛나는 선생님 말씀…요즘 애들은 몰라
교사도 학생도 부모도 모두 불행한 교육 끝낼 수 없나

그날 이후 난 매일 달밤의 체조에 나섰다. 세월이 흐르며 동작들은 그때그때 바뀌었으나 하루 30분씩 체조하는 습관만큼은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 비록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나잇살을 피해 가진 못했어도 건강 관리엔 큰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다. “서신석 선생님, 감사합니다! 예언이 절반은 맞았네요.^^”

이처럼 학창 시절 들었던 선생님 말씀 중에 금과옥조로 삼은 게 한둘이 아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는 비빔밥 한 그릇 후딱 먹고 헤어지고 좋은 사람과는 전골을 보글보글 끓여가며 오래오래 얘기 나눠라.” T.P.O(시간·장소·상황)에 걸맞은 메뉴 선정의 중요성을 알려주신 고교 때 가정 선생님의 센스 만점 조언이다.

같은 여자 입장에서 시대를 훌쩍 앞서 진취적 여성상을 일깨워 주신 국어 선생님도 기억에 생생하다. “뭐든지 사줄 남자를 바라지 말고, 남자한테 뭐든지 사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여자가 되거라.”

그땐 그랬다. 자다가 떡이 나오진 않더라도 선생님 말씀 잘 들으면 피가 되고 살이 되려니 했다. 그런데 딸아이를 키워 학교에 보내고 보니 우리 세대와는 영 달랐다. 호칭부터 ‘담임 선생님’이 아니라 그냥 ‘담임’이었다. 사교육에 밀려 황폐화된 공교육의 현장. 그곳엔 교사를 믿고 따르는 학생도, 학생을 아끼고 보듬는 교사도 찾기 힘들었다. 학부모인 나 역시 자칫 우리 애가 교사에게 밉보여 입시에서 손해나 보지 않을까 전전긍긍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운 좋게 연수 기회를 얻어 미국의 소도시에서 아이와 함께 지냈던 1년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한 선생님은 학기 초에 “일회용 카메라를 사서 학급에 기증해 주시겠느냐”고 메일을 보내왔다. 학기 말 되돌아온 그 카메라엔 아이 학교생활의 소중한 순간순간이 담겨 있었다. “○○의 이런 모습이 참 자랑스럽지 않으냐”는 애정 어린 쪽지와 함께.

딸애의 담임 교사였던 랍 프레스콘 선생님 역시 절로 존경할 만한 분이었다. 박물관 견학 때 봉사자로 따라가 보니 미국 중학생들 역시 어지간히 말을 안 듣는 거였다. “박물관 규칙이니까 사전에 껌이나 사탕을 뱉으라”고 누누이 당부해도 끝까지 입속에 숨겨둔 애들이 부지기수. 그런데도 인상 한 번 안 찌푸리고 똑같은 얘기를 차분히 반복하는 인내심에 탄복하고 말았다.

당시 영어도 안 통하고 친한 친구 하나 없는 학교를 우리 아이가 군말 없이 다녔던 유일한 이유는 바로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는 선생님들이었다. 물론 미국 공교육에도 문제가 많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학생도 교사도 학부모도 다 같이 행복한 학교가 일부나마 존재한다는 게 한없이 부러웠다. 얼마 전 스승의 날을 즈음해 교권 침해가 갈수록 심각해진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새삼 그 시절 기억을 떠올렸다. 선생님들이 행복해야 학생도 학부모도 그럴 텐데 지금 같아서야 도무지 희망이 없다.

마침 올해 초 새내기 교사가 된 딸아이 친구가 생각 나 첫 스승의 날을 지낸 소감을 물어봤다. 별 감동 없는 그저 그런 하루였다고 했다. “업무량이 너무 많아 학생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보단 주어진 일을 끝내는 데만 급급한 처지”라나. 그러면서 “학생 땐 선생님들이 도대체 왜 저러시나 했는데 그렇게밖에 할 수 없게 만드는 학교 현실이 문제였다”고 씁쓸해했다. 솔직히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꿔야 할지 난 잘 모르겠다. 다만 모두가 불행한 한국 교육에 마침표를 찍어줄 사람이 있다면 다음 대통령, 아니 그보다 더한 것도 시켜주고 싶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