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팔린다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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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저… 혹시 언니가 방송국에 다니지 않으십니까?』
지난 여름 무척 더웠던 날, 옆자리에 앉았던 한 아저씨가 나를 아래위로 찬찬히 훑어보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근데 누구시더라…어디서 많이 뵌 분이긴 한데….』
거리를 다니다보면 하루에 한두번은 예외없이 이런 인사를 받곤한다.
며칠전 택시에서였다.
백미러로 나를 유심히 보던 운전기사 아저씨가『아유, 안녕하세요? 뉴스에서…』하면서 반색을 하는게 아닌가.「아차! 또 들켰구나」하는 낭패감으로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그도 그럴것이 청바지에 T셔츠·운동화를 신고 머리는 헝크러져「왈가닥」인 나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직업이 근엄한(?)얼굴로 뉴스를 전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제버릇 누구 못준다고 항상 정장 차림에 얌전한척 할수는 없는게 아닌가.
그렇지만 이런때 누가 아는척이라도 하면 나의 모든 것을 다 들켜버린 것같은 창피함·어색함을 감추느라 나도 모르게 뾰로통해지기 일쑤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아저씨는 『제가 운전하다보면 세간에 알려진 사람을 많이 태우게 되는데… 한가지 특이한 사실이 있읍니다. 나이가 지긋하고 좀 덕이 있으신 분들은「아이고, 감사합니다. 저를 다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하고 겸손한 얼굴로 대답하지만 젊은분들은 마치「무슨 저런 사람이 다있어?」하는 듯이 굉장히 기분나쁜 표정을 짓데요』하는게 아닌가.
그날밤 난 그 아저씨의 이야기가 자꾸만 생각났다. 왜 나는 나를 기억하는 분들에 대한 고마움과 소박한 정을 진작에 깨닫지 못했을까?
그 아저씨에게서 얻은 큰 가르침으로 난 그후 지나간 날들의 나의 경솔한 행동을 깊이 부끄럽게 생각했다 (비록 내나름대로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
그러나 아직 내가 가지고있는 연륜이 그렇게 「깊고」또「크지」못한 까닭에 그 순간의 어색함만은 어쩔 수가 없다.
남 앞에 선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나같은 애송이에 있어서랴. 박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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