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여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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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언젠가 매력있게 생긴 아가씨가 만나자는 부탁을해서 나간 일이 있다. 갓 스물이 됐을까. 이런저런 얘길하는데 요지는 배우가 되고싶다는 뜻같다. 벌써 매니저격으로 사촌언니가 따라다니고 있으니 야심도 만만치않다.
예쁜 얼굴이긴 한데 내 눈으론 아직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의견을 말했다. 공부도 더하고 연기수업도 더 쌓고 그런 후에 해도 늦지않지 않겠냐고. 그랬더니 이 아가씨 마치 모욕이라도 당했다는 듯한 얼굴로 말똥말똥 쳐다보더니 몹시 자존심이 상했던지 갈때는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영화감독을 하다보니 그런 식으로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내 이름만 듣고 찾아오는 일이 적지않다. 배우가 되고싶고, 작가가 되고싶고, 감독이 되고싶고 등등. 그런데 하나같은 느낌은 너무들 서두르고 있다는거였다.
기초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큰 기회부터 거머쥐고 싶은 객기야 내게도 경험이 있으니 이해야 가지만 모든 일에는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서두른다는 느낌은 우리영화에 대한 일반적 기대감도 마찬가지다. 왜 칸영화제의 상을 못타는가. 왜 프랑스영화처럼 세련되지 못한가-.그래서 무모한 시도들도 해보지만 어디 아기가 달리기부터 배우던가.
봄에 피는 꽃은 결코 열매를 맺기위해 피어나지 않는다. 얼어붙은 대지가 녹아들면 텅빈 가지위에 목련이 피고 개나리, 진달래가 피어나지만 그것들은 잠시 피어나 울창한 잎을 맺기위한 밑거름이 된다.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한국영화는 열매가 아닌 잎을 맺기위한 봄꽃을 피우려는 이제 막 일어서는 아기와 같다.
영화를 하고 싶어하는 젊은 그들도 곧 봄꽃과 같다.
우리는 알고 있다. 꽃은 보는 자에게나 아름다움이지 나무에는 하나의 진통임을. 잎을 맺기위한 봄꽃의, 열매를 맺기위한 여름꽃의, 씨앗을 맺기위한 가을꽃의 진통임을 우리는 알고있다.
기다릴줄아는 여유와 스스로를 성숙시킬수 있는 지혜를 우리들 모두가 가져야한다. 배창호<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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