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사랑의 빛 온누리에 가득|27일은 「부처님 오신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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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서울 삼각산 도선사 계곡의 5월은 세속 번뇌를 씻어줄 듯한 개울물 소리와 신록의 푸르름이 싱그럽기만 하다.

<백만불자 동원>
박 덩굴처럼 주렁주렁 달려가는 민속축일 4월초파일의 도선사 연등들이 계곡을 뒤덮는 신록의 내음에 또 하나의 향기를 더해준다.
세상 무명을 밝히려는 갖가지 모양의 오색찬란한 불탄봉축 연등들-.
「부처님 오신날」 공휴일제정 10주년을 맞은 한국불교의 이번 4월 초파일은 어느해보다도 감회가 깊다.
전국 불교사암은 종파를 초월, 하나로 뭉쳐 「부처님 오신날」을 전래의 민족명절로 다시 승화시키고 인간해방의 선언인 불탄의 의의를 이 시대에 새롭게 투각하려는 원력을 불태우고 있다.
그래서 어느해 초파일보다도 많은 연등을 밝혀 축제분위기를 돋우고 서울 여의도광장에 한국불교사상 유례가 없는 1백만 불자동원의 불탄봉축 대제전 (25일 하오2시) 을 마련, 불교도「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발심을 펼쳤다.
초파일을 사흘 앞둔 24일 저녁까지 도선사에 달린 불탄봉축 연등은 5만여개.
전국 사암의 초파일 연등들은 작게는 자신과 가족의 부귀영화를 비는 소박한 기복으로부터 크게는 중생을 끝없이 구원하겠다는 대승보살의 원력을 밝히고 있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인간해방의 종교다. 부처님 탄생의 의의도 바로 무명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중생제도 우선>
물론 불교가 추구하는 1차적 해방은 내심자증의 절대자유를 얻는 내면적 해방이다.
그러나 대승보살은 빈자일등의 고사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가난만 사람, 병든 사람, 억눌린 사람에 대한 사회적 구원의 지평을 자신의 내면적 해탈 못지 않게 중시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이웃이 병들면 보살이 아프고, 중생의 고통이 바로 부처의 고통이다. 따라서 이 현실속에서 만나는 중생 모두가 부처인 것이다.
보살은 자신의 이웃에 구체적 모습으로 나타난 부처의 역사적 현존을 발견, 지금 여기 (Here and Now) 에서 일하고 있는 부처의 삶을 살아간다. 절간의 불상을 찾아 예불하기보다는 중생의 배고픔을 메워줄 한닢의 동전 포시와 동정 (비) 을 우선해 실천하는게 바로 보살행이다.
한국불교는 자타가 공인하는 바대로 북방 대승불교다.
중생제도를 우선시하는 한국불교 대승의 애민중생 정신은 l천6백여년동안 민족사의 심층에까지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면서 민족문화전통의 큰 지주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신라·고려때는 불교가 국교의 지위를 누렸고 4월 초파일이면 관가와 불신자 민가에까지 모두 연등을 달아 불탄을 찬탄했다.
초파일 연등놀이는 고유민속의 하나로 굳혀져 불교를 배척한 조선조에서도 불교계만의 행사가 아니라 백성 모두가 즐기는 축제였다.

<풍년제와 관련>
『동국세시기』는 고려때까지 크게 성행했던 연등놀이가 초파일뿐 아니라 정월보름과 2월에도 등을 달았으나 조선조부터는 초파일 연등만 전해져온다고 기술해 놓았다. 학자들은 정월연등은 농경시대의 풍년제와 관련을 가진 것으로 본다.
초파일 연등행사에는 관등·물장구놀이 (수부) 등의 민속이 곁들여지기도 했다.
강에 연등 배를 띄워 온누리를 비추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구경하는 관등은 큰 구경거리였다. 초파일 저녁이 되면 장안의 남녀들은 저녁을 먹은 후 산기슭에 올라가 산사에 달아놓은 휘황찬란한 연등을 구경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모이면 각종 풍악이 울려퍼지고 장안은 불야성을 이루면서 각종 민속놀이판이 벌어졌다. 아이들은 등대밑에 송편·검은콩·삵은 미나리나물을 벌여놓고 손님을 맞는가 하면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등나무밑에서 느티떡·소금에 볶은 콩을 먹으며 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돌아가면서 두드리는 물장구놀이를 했다.

<"인간해방" 축일>
원래 연등의 유래는 부처님 공양방법의 하나로 시작됐고 옛날에는 가족수대로 등을 달았으나 요즈음은 일가일등으로 바뀌었다.『법화경』『불설시등공덕경』등은 등공양 공덕의 무량함을 설하고 있다.
연등회같은 특수 형식의 행사로서보다는 설법등과 같은 의식행사에서의 공양방법이었던 연등에는 빈자일등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사바티의 한 가난한 청신녀 「바루다」는 길가에서 동전 두닢을 동냥, 등을 사서 부처님의 아세사왕 초청 왕궁설법장에 달았다.
그런데「바루다」여인의 등은 새벽까지 가장 오래 남아 설법을 끝내고 기원정사로 돌아가는 부처님의 발길을 밝혀주었다.
「바루다」의 빈자일등은 바로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4월 초파일 연등놀이는 이땅의 백성 모두가 참여, 불탄의 광명이 비추어지는 인간해방의 기쁨을 나눈 민족적 축일이었다.
이제 한국불교는 중생사랑의 지평을 새롭게 넓히면서 바른 것을 바르다 말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선언하는 예언적 사명과 부처님 증언의 연등을 밝혀야겠다. <이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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