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서」의 자율심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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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부가 이른바 「불온·불법」서적을 기습단속한 조치가 출판·학술·문화계에 준 충격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불온」의 한계가 어디까지며,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를 비롯해 이같은 조치가 학문적인 침체를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소리도 있다.
정부와 민정당이 분야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불온간행물 심의자문기구」를 구성하기로합의한 것은 이번 조치가 준 충격을 최소화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먼저 이 기구가 법리에 의해 불온·불법간행물의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문제 간행물의 내용을 자율적으로 심의하는 기능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신봉하는 자유 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파괴하도록 선동하는 내용의 출판물이 나돌아, 배움의 도상에 있는 학생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일이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바람직하지 못한 측면이 있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여기엔 법치국가에 걸맞는 법의 명시가 전제되어야 한다.
당국이 내세우는 현실적인 이유와 학문연구, 출판문화의 발전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두가지 조건을 충촉시킨다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다. 또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한 사상의자유를 제약하는 일은 사실상 어렵다.
그렇지만 기왕 정부·여당이 심의기구 구성에 합의했다면 이 기구는 무엇보다 자율성을 갖고 운영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미국도 방송이나 체신·철도등 그 수행기능이 공적 성격이 짙은 분야는 자체 심의기구를 두어 자율 규제토록하고 있다.
방송의 경우 공익과 편의및 필요(convenience and necissity)를 위해 자체 심의위원회를두어 외설·복권등의 문란한 광고와 허위·과다광고 행위등을 심의위원회 주도로 자율규제토록하고 있다.
광고뿐아니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반도덕적 외설기사도 스스로 방송하지 않도록 가이드라인을 정해두고 있다. 이같은 자율규제는 강압적인 타율규제보다 시행에 보다 좋은 효과를 거두고 있으며 자체 심의위원회의 기능과 역할이 갈수록 원숙해져 운영의 묘를 살리고있다.
자율규제방식은 일종의 간접규제로서 각 방송매체가 심의위원회의 원리 강령을 어겼을 때는 우편요금이 싼 2종 우편물 취급 혜택을 취소시키거나 정부의 보조대상에서 제외하는 등어디까지나 간접규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고 등록취소등 직접적인 규제는 최후까지 유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적 성격이 짙은 분야의 자체심의 기능은 그동안 꾸준히 확산되어 왔다.
가령 대중문화의 근간을 이루고있는 영화 검열도 그동안 관이 주도함으로써 논란이 많았는데 영화법이 바뀌어 금년 하반기부터는 공륜이 주관하는 민간심의 기구로 넘겨져 자율화하게 되었다.
출판이라고 자율화를 실현 못할 이유는 없다. 지하 출판물이라든지, 기타 합법적인 절차를 밟지않고 출판되는 서적에 대한 단속에서 혹시 법적인 미비점이 있다면 이기회에 단속법규를 만들어야겠지만 적법서적에 대한 심의는 대학교수등 저술인과 출판 관계자의 「양식」에맡기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는 뜻이다.
출판물 단속은 사상과 이념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있다. 자율에는 책임이 따르는 것이므로 서적심의를 전문인들 자신의 손에 맡기는 것이 행정편의에 흐를우려가 있는 관주도보다 훨씬 효율적일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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