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8) 제82화 출판의 길 40년(31)-오프세트 인쇄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보진재가 창설될 당시의 시설은 수동 석판인쇄기 3대였다. 수동 석판인쇄기란 등사판 기계로 등사해내듯이 인쇄물을 한 장씩 찍어내는 것이었으니, 그야말로 기계를 다루는 사람의 정성과 숙련이 따라야 하는 공정이었다.
22세의 엘리트 김낙훈이 인쇄일을 도우려 그의 부친 밑으로 들어온 것은 보진재가 창립된지 3년만이었으나, 이 인쇄소는 초창기부터 김진환·김낙훈 부자의 정성과 기술의 합작이었던 것이다.
보진재는 1920년 중부 서린방(현 광화문우체국 동쪽)에서 종로네거리 보신각 뒤쪽 관철동으로 이사했는데, 2백평이나 되는 큰 한옥이었다. 5배나 넓은 새 사옥으로 확장한 셈이다. 그리고 6·25사변 때까지 30년 동안 보진재는 이곳 관철동을 지켰다.
관철동으로 공장을 옮겨오면서 일본 본전제 국반절 머신기 1대와 사륙전지 알루미늄 평판기 1대를 들여왔다. 머신기란 수동이 아닌 동력화한 석판기를 말한다. 알루미늄 평판기란 알루미늄판에 기름먹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전사하여 인쇄판을 만들어 동력으로 인쇄하는 기계였다.
이 기계는 일제하에서 조선인에 의해 최초로 들여온 최신 동력석판 인쇄기였다는데 큰 의의가 있었다.
1924년 보진재는 또다시 일본(삼본제)국전평판 오프세트 인쇄기 1대를 들여온다. 이 기계 역시 민간업자로서는 이 땅에 최초로 들여온 오프세트 인쇄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진재가 비로소 오프세트 인쇄업무를 시작하자 회동서관·한성도서·신구서림·영창서관·덕흥서림·세창서관 등 당시 유수의 출판사들은 제작상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게 되어 쾌재를 부르며 기뻐했다.
보진재가 일제 오프세트 인쇄기를 과감하게 시설할 수 있었던 것은 보진재 공장 바로 이웃에 기독교서회와 성서공회가 있어서 그런 이웃사촌의 정의로 성서와 찬송가의 인쇄를 다량 주문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1927년에는 일제 매엽지용 윤전식 오프세트 인쇄기 2대를 들여왔다. 드디어 1935년에는 모든 원색화의 색조를 살리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로 프로세스 제판기를 도입했다.
1912년 창설 당시의 수동 석판기는 그 성능이 시간당 단색 30장을 찍었으니 하루 열시간이라야 겨우 3백장밖에 못 찍었다. 이러했던 사실이 동력화 하고 종이를 손으로 기계에 삽지하는 것으로 발전하여 시간당 2천장을 찍어내게 되었다.
1924년 최초로 완전자동 오프세트 인쇄기가 들어옴으로써 한시간에 8천장에서 1만장을 찍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같은 우수한 성능에 대해 당시 출판계와 인쇄업계에서는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이같이 우수한 성능의 인쇄시설과 기술의 축적은 필연적으로 출판사업의 의욕을 부추겨 주였다.
그리하여 1925년부터 1935년에 이르는 10년이라는 시기는 이 땅에 월간잡지 범람의 현상을 가져왔다. 10년 사이에 무려2백35종의 월간지가 명멸했던 것으로『잡지70년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잡지들은 창간호가 바로 종간호이거나 태반이 3호를 넘기지 못했다고 하니, 표지나 화보와 같은 일감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한국 출판계는 소량 다종이라는 어려움으로 보진재 역시 실속 없는 인쇄일로 한 시기를 보냈을 것이다.
나는 이같은 사실들을 기록하면서 인쇄업계의 숨은 노고에 새삼 감사한다.
보진재의 전기 30년은 고스란히 우리나라 평판인쇄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