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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법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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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미국 미시시피주의 한 소도시. 술과 마약에 취한 두 명의 건달에게 소녀가 강간 당한다. 범인들은 이틀 만에 체포됐고 이들이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의 계단을 유유자적 오르는 순간 문 뒤에서 기다리던 소녀의 아버지가 기관총을 난사한다. 아버지는 현장에서 검거돼 법정에 세워지고 이 아버지의 변론을 둘러싸고 치열한 암투가 전개된다. 1996년 개봉된 영화 '타임 투 킬'의 줄거리다.

이런 법정 난동은 영화나 소설 속의 소재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달 11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풀턴 카운티 법원 법정에서는 강도 등의 혐의로 재판받던 30대 피고인이 호송 보안관의 총을 빼앗아 판사와 속기사 등을 향해 난사, 4명이 숨졌다.

한국도 안전 지대가 아니다. 지난 15일 서울동부지법에서 상해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던 황모씨는 자기를 고소한 부인이 증인선서서에 서명하려는 순간 흉기를 휘둘러 법정을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지난달 서울중앙지법에서는 방청석에 있던 70대 노인이 업무상 횡령 혐의로 구속된 딸을 고소한 사람의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97년 8월에는 "잘못된 판결을 받아 억울하다"며 30대 남자가 수원지법 성남지원장실에서 지원장을 흉기로 찔렀다.

재판 중인 판사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소란을 피워 유치장에 감치(監置)되거나 과태료 처분을 받은 사람이 지난해 51명이었다.

법 집행의 마지막 보루이자 정의를 바로세워야 할 법정에서 불법이 자행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판사들도 재판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법치주의 국가라고 하기에 부끄러운 상황이다.

그러나 법정 난동은 어느 정도 예견돼 왔다. 마음만 먹으면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법정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서울고법 청사의 경우 17개 출입구에 검색대가 설치돼 있으나 작동하는 것은 4개뿐이다. 경보음이 울려도 통과하는 사람이 공항처럼 소지품이나 몸수색을 당하는 일은 거의 없다. 검색할 직원이 없기 때문이다. 검색대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그나마 서울은 사정이 나은 편이고 다른 지방법원.지원은 검색대조차 없는 곳이 수두룩하다.

법정 안은 문제가 더 심각하다. 직원 한 명이 질서 유지를 담당하지만 그 흔한 곤봉이나 가스총도 없다. 피고인이나 방청객이 흉기를 휘두르면 맨손으로 막아내야 할 형편이다.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법정 난동이 잇따르자 대법원은 내년에 '법원 경찰대'(가칭)를 창설하겠다고 밝혔다. 올 상반기 중에 모든 지방법원에 검색대와 폐쇄회로 TV를 설치하겠다는 대책도 내놓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필요하다면 법원조직법을 개정해 최장 20일인 감치 기간을 늘리고, 100만원 이하인 과태료를 높여 경각심을 일깨워야 한다. 검색요원이 부족하면 관계 부처와 협의해 공익요원을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만하다.

사회적 갈등에 대해 최종결론을 내리고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 법원의 임무다. 이를 위해서는 증인 등이 자유롭게 진술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신성한 법정을 실력 행사의 장이 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안전하게 재판 받을 수 있는 국민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은 일차적으로 사법부의 몫이다.

김상우 사건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