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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의 이중성 … “무해” 주장하며 피해자엔 합의금 제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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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정부가 2011년 실체를 공식 확인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망사건의 최대 가해자인 살균제 제조업체 옥시레킷벤키저(현 RB코리아)가 피해자나 유족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하며 보상 관련 합의를 제안해 온 것으로 20일 확인됐다.

“소 취하 조건, 원하는 금액 말하라”
1000만~수억원 합의금 기준 마련

옥시 측이 검찰 압수수색 대비해
조직적으로 문서 폐기 단서 포착

특히 회사 측은 사망자 유가족, 생존 환자별로 1000만~수억원의 보상금을 차등 지급하고 정부 조사 결과 1, 2등급이 나온 피해자들만 합의 조정 대상으로 선정한다는 등의 내부 기준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최근까지 서울대·호서대에 의뢰한 실험 결과를 근거로 “제품의 유해성이 드러나지 않았다”며 무해성을 주장하다가 검찰 수사 본격화 이후 보상 기준까지 정해 합의에 나선 것을 두고 이중적 행태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옥시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사망자 70%(103명)가 사용한 ‘옥시싹싹 NEW가습기당번’을 제조·판매한 업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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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진행 중인 A씨(44)는 20일 “지난달 중순 옥시 측으로부터 합의하자는 제안을 받았다”며 “소송을 취하하는 조건으로 원하는 금액을 말해 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A씨 가족은 2009~2011년 옥시 제품을 사용한 뒤 호흡곤란 등 이상 증세를 겪었다. 보건복지부 폐손상조사위원회로부터 아홉 살 딸(1등급 피해 판정), 일곱 살 아들(3등급), A씨와 부인(4등급) 등 4명이 모두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A씨는 “가족 치료비 등을 산정해 1억원대의 액수를 옥시 측에 제시했더니 절반 수준에서 합의하자고 해 거부했다”고 말했다.

한 피해자의 소송대리인인 B변호사는 “옥시 측이 합의를 위해 내게 접촉해 왔고 보상 기준을 설명해 줬다”고 말했다. B변호사는 “‘합의문에 옥시가 피해에 대한 책임 때문에 합의금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문구가 포함된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관련 민사소송들은 현재 법원에 2~4년간 장기 계류 중이다. 이 때문에 일부 피해자들은 옥시 측의 합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있다.

법무법인 ‘바른’이 대리하는 소송에서는 최근 석 달 새 피해자 유족 총 27명이 옥시로부터 합의금을 받고 소송을 취하했다. 익명을 원한 한 변호사는 “검찰의 처벌 수위가 높아지면 합의에 더 많은 돈이 들 것이라고 옥시가 판단해 합의를 서두르는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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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서울중앙지검 가습기 살균제 특별수사팀(팀장 이철희)은 옥시 측이 압수수색에 대비해 사건 관련 문서들을 조직적으로 없앤 단서를 잡고 수사 중이다. 검찰은 임직원들이 주고받은 e메일 등을 통해 옥시가 살균제 원료(PHMG) 제조사인 SK케미칼로부터 받은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폐기한 흔적을 찾아냈다. MSDS는 화학물질의 안전한 사용·관리를 위해 주요 성분과 주의사항 등을 담은 자료다. 이 자료엔 PHMG의 성분을 유해물질로 분류하고 “먹거나 마시거나 흡입하지 말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검찰 관계자는 “이는 옥시 측이 제품의 유해성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판단하는 데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수사팀은 지난 19일 옥시의 인사담당 김모 상무를 조사해 제품 제조·판매와 관련한 의사 결정 및 보고 체계를 파악했다. 또 21일엔 옥시의 민원 담당 직원 2명을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한다. 옥시가 2001년 제품 출시 이후 자사 홈페이지에 올라온 소비자들의 피해 호소 글을 지우게 된 배경을 캘 방침이다. 삭제 과정에서 신현우(68) 옥시 전 대표이사 등 경영진의 개입이 있었는지도 확인할 계획이다. 

장혁진 기자 analo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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